[백세시대 금요칼럼] 내가 퇴마사다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내가 퇴마사다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3.03.20 10:57
  • 호수 8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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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16년 전 엄마를 여읜 나는

몸도 아프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지인 권유로 점쟁이 찾아가

굿할 뻔하다 가까스로 정신 차려

셀프상담으로 문제 해결한 적도

16년 전, 누런 나뭇가지마다 ‘야시시한’ 연둣빛이 감돌던 딱 이맘때, 제일 좋아하는 엄마를 잃었다. 내 나이 20살 되던 해에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함이 맞고, 엄마는 잃었다 함이 옳을 것 같다. 

지킬 수 있었는데 놓친 그런 느낌이랄까? 잘은 모르겠다. 어쨌거나 엄마를 잃고 나서 한동안 많이 아팠다. 낮에는 아픈 줄도 몰랐지만, 집에만 돌아오면 열이 나고 온몸이 욱신욱신했다.

무엇보다 불면증이 문제였다. 잠들기도 힘들었지만 자다가 수십 번은 깼다. 깨서 시계를 보면, 1시11분, 2시22분, 4시44분... 무슨 이런 우연이? 이 숫자가 뭘 암시하나. 엄마 영혼이 와서 날 깨웠나? 별별 상상이 다 되고 온갖 잡념이 머리에 가득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앞에 누가 있는 것 같고, 벽에 하얀 그림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엄마라면 그토록 사랑했던 나를 해칠 이유가 없기에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이왕 오셨다면 얼굴이라도 보여주라며 혼자서 중얼거리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둘러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미친X’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그때 마침 사무실에 찾아온 후배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굉장히 용한 점쟁이가 있는데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한번 해보라’며 명함을 건넸다. 강남 주택가 근처에 있는 보살인데 자신의 골칫거리를 여기서 다 해결해 줬다며 꼭 가보란다. 

그래도 며칠을 가지 않고 더 버텼다. 이러다가 정신 줄을 놓아버리면? 아차. 이건 아니다. 주섬주섬 명함을 꺼내 그 집을 찾아갔다. 다행히도 손님은 없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우환이 있느냐 물었다. 몸이 힘들다 말했다.

집에 아픈 사람이나 속 썩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면서 혹시 돌아가신 분은 없냐 묻기에 ‘참 용하기도 하지’ 싶어 그 후로 줄줄이 다 털어놨다. 엄마가 딸을 두고 못 떠나셔서 아프다며 굿을 해야 한단다.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돈만 내면 자기가 알아서 다 하고 굿하는 과정도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며 ‘돈 다른 곳에 덜 쓰고 몸 생각해서 하세요. 자식들 미래도 챙겨야지요’ 하는데, 자식 얘기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1000만원 이상 받아야 하지만 내가 인상이 좋아 반값에 해준다면서 오늘은 계약금만 내고 가란다. 십만 원으로 계약금을 내고, 굿할 날을 받아 집에 오는데 기분이 찜찜하고 이상하면서 불쾌하고 억울하고 심지어는 창피했다.

아니 나 방금 뭐한 거지? 내 직업이 여자들 고민 듣고 해결해 주며, 역경을 딛고 건강하게 일어서게 해주는 역할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나랑 무당이랑 매한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무당이었네. 내 고민을 내가 들어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눈을 감았다. 조용하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힘든 고민을 내 자신에게 조곤조곤 다 털어놓았다. 몸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몸도 노곤하다. 천천히 일어나서 점집에 전화했다. 남편 핑계를 대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아 ‘남편이 돈을 안 줘서 굿을 취소하겠다’ 했다.

무슨 여자가 비상금 하나 없냐며 벌컥 화를 내며 난리다. 그녀의 바뀐 반응을 보니 굿을 안 할 이유가 더 확실해졌다. 그 대신 굿했을 돈 500만원은 돌아가신 엄마를 위해 쓰기로 했다. 노래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엄마를 위해 다음날 ‘노인복지회관 할머니 노래 부르기’란 곳에 선뜻 500만원을 기부했고 한 달 후엔 감사패까지 받았다. 

그 후로 잠은 어땠냐고? 물론 잘 잤다. 잘 자고, 잘 먹고 예전보다 일도 더 열심히 했다. 그간의 많은 이상한 일들이 다 내 대뇌가 만들어낸 농간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 ‘퇴마사’라는 영화를 보다가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요즘 사람들이 굿이 뭔지 무당이 뭔지 알겠나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다. 다방을 처음에는 커피숍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카페라 하듯이 ‘굿, 무당’이란 말도 젊은 감각에 맞게 ‘퇴마, 퇴마사’라 하는 모양이다.

지금 경제도 엉망이고 미래가 불확실한 탓인지 퇴마사가 핫한 직업이란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인간은 다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마치 더러운 집을 청소부에게 맡기듯이 정신 속 악마를 깨끗하게 치워줄 퇴마사가 생각난다면, 자신이 직접 퇴마사가 되면 어떨까.

조용히 눈을 감고 진정한 나와 마주한 다음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기를 원하는지 또 해결방법은 뭐가 있을지 내게 물어보자.

문제집을 사면 문제집 뒤에 해답이 붙어 따라오듯이 어떤 문제가 내게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풀 해답도 내게 있더라. 이런 오묘한 인간의 뇌, 무슨 짓을 해도 AI는 못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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