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박정희 前대통령 ①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박정희 前대통령 ①
  • 관리자
  • 승인 2006.08.2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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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린 시절, 강골로 튼튼하게 자라

초등학교 1학년 때 20리 걸어 학교 다닌 체력
“이 땅에서 가난 추방하겠다” 강한 의지 보여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세번째로 박정희 전대통령 편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7남매(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한 농부 박성빈(朴成彬·아버지)과 백남의(白南義·어머니) 부부에게는 막내의 출생을 반길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사람은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말이 있기는 해도 당장 입 하나 늘어나는 것이 가난한 집 사람들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어머니가 간장을 먹고 언덕에서 뒹굴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키가 작고 보통사람보다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것도 태아 때 유산을 시도한 후유증이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얘기도 있다.

 

 

‘실록 박정희’를 쓴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에 따르면 1971년 12월 한 검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박정희대통령 자신이 유산되지 않고 살아 태어날 수 있었던 데 대하여 독백하듯이 했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상 만물에는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데, 내가 살아서 출생하게 된 것에는 필시 하늘의 뜻이 있지 않았겠나. 하늘의 뜻으로 나는 기적적으로 태어났다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늘의 뜻이 우리 민족의 가난을 추방하는 기적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수많은 국민들이 가난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한 맺힌 삶을 살아왔는가.”

 

가난 때문에 하마터면 태어나지 못할 뻔 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땅에서 가난을 추방하겠다는 강한 투지가 보인다. 술이 얼큰히 취하면 김용태(金龍泰) 전의원에게 항상 빼먹지 않고 되풀이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는 배고픔이었다고 한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은 마치 리얼리즘 소설 속의 한 장면 같이 적빈(赤貧) 그 자체다.

 

점심시간이 되어 다른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는 동안 박정희 학생은 운동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도 먹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배고픈 박정희 소년은 부엌을 열심히 뒤졌으며, 매번 먹을 것을 찾지 못해 나중에는 짜디 짠 간장을 손으로 찍어먹고 물을 마시고, 다시 간장을 찍어먹고 물을 마셨다고 한다.

 

배고픈 경험 이야기 자주 해

 

1960년대에 촬영된 구미의 박 대통령 생가 사진을 보면 가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먹을거리도 변변치 못한 집에서 자랐음에도 박정희 소년은 튼튼했다. 막내로 귀염을 받기도 했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절도 있고 강한 아이로 자랐다. 초등학교까지는 3개의 재를 넘어가는 험한 20리 길이었으나 박 대통령은 코흘리개 1학년 때부터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20리 길은 어른들의 걸음으로도 2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래서 아침이면 신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아침 잠이 많기 마련이었으나 박정희 소년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는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고 영리한 학생으로 초등학교를 마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다른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다수 국민들이 겪은 생활의 어려움을 어려서 보통사람과 똑같이 겪었다. 그래서 후일 대통령이 되어서도 가난추방의 천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음악과 역사에 해박해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박정희 소년의 모습은 수십년이 흐른 1960년대나 1970년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돈이 들지 않는 사범학교 진학을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설사 사범학교에 합격한다고 해도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이었다. 학비가 면제된다고 해도 사범학교가 있는 대구는 외지였고 숙식비를 비롯한 생활비가 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 바로 교사로 취업할 수 있어 부모의 마음이 움직였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또 박 대통령도 사범학교 진학의지가 강했다.

 

‘청년 박정희’의 저자 정영진씨는 일제시대 사범학교의 교과과정이 원래 체력적인 면을 중시하는 편인데, 대구사범의 경우는 유난히 체력을 강조한 학교였다고 한다. 국민(황국신민)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이라면 체력이 우선 튼튼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간 박정희 청년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지적인 분야, 학구적인 면이나 예술적인 면 보다는 스포츠나 체력단련 혹은 군사훈련 분야에서 더 뛰어났다. 늦둥이로 아이를 본 어머니의 젖이 부족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누나의 젖을 먹었을 만큼 영양결핍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도 타고난 싸움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무강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박정희 청년이 예술을 몰랐다거나 지적인 면에서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사범학교의 밴드부에서 나팔(트럼펫)을 불었을 만큼 음악에 소양이 있었고 동·서양사에도 밝았다. 특히 한국사 분야에서는 훗날 박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역사학자들이 인정할 만큼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해박했다고 한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음악 분야에 취미가 있어서 청와대에서 밤늦게 혼자 퉁소를 불고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마을 노래’를 작사·작곡하여 전국민이 함께 부르게 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려서 어떤 음식을 좋아했고, 무슨 반찬을 많이 먹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식민지 시대 백성들이 먹는 보통의 밥상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시절은 돌아서면 뭔가 먹고 싶어지는 한창 젊은 나이였으나, 어려운 살림에 대구까지 유학을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영양실조 직전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눈만 번뜩이던 보통학교 선생님’ 제자들 기억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의 보통학교에 부임했을 때 박정희 선생님의 이미지는 유명하다. 박 대통령에 대해 쓴 여러 책과 기고문, 그리고 당시 제자들의 입을 빌어 한결같이 인용하는 얘기가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눈만이 유독 번쩍번쩍 빛났다’는 사실이다. 그때 제자들과 찍었던 사진이 남아 있는데, 지금 보아도 강단지고 투지가 불타는 인상이다.

 

박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은 “식생활요  뭐 특별할 것 있나요.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빤하잖아요. 그것을 보통으로 드셨어요”라고 말했다. 최고의 권좌에 오른 뒤에도 박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을 즐긴 천상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청년 박정희’를 쓴 정영진씨는 타고난 강골 체질이었으나 50대 후반 무렵부터는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고 한다. 과로와 술과 담배가 지나쳐서 보통의 장수(長壽)하는 스타일의 체질은 아닌 듯하다는 것이다. 술은 젊어서도 즐겼고, 국가 경제개발을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때의 겉모습은 먼발치에서 본 모습일 거라고 한다. “원래도 얼굴이 까무잡잡해서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을 거예요. 혁명 직후 잠시 선글라스를 끼어 억측을 낳게 했다고나 할까요.”  〈계속〉

 

박병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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