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1]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청계천 공사, 영조 “청계천이 다시 안 막히나?” 신하 “100년 범람 없어”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1]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청계천 공사, 영조 “청계천이 다시 안 막히나?” 신하 “100년 범람 없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3.27 13:27
  • 호수 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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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광통교에 새겨진 ‘경진지평’. 경진년(1760년)에 새긴 표석. 토사가 글자를 가리지 않는 식으로 청계천을 관리했다.
청계천 광통교에 새겨진 ‘경진지평’. 경진년(1760년)에 새긴 표석. 토사가 글자를 가리지 않는 식으로 청계천을 관리했다.

1760년 영조가 21만여명 동원해 두 달 간 공사…맹인도 부역 원해  

교각에 ‘경진지평’ 글자 새겨 토사가 글씨 가리지 않는 식으로 관리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이명박을 서울시장, 대통령에까지 오르게 한 배경 중 하나가 청계천이다. 청계천 복원을 공약한 이명박 후보는 32대 서울시장에 당선된 후 3,800억을 들여  청계고가 철거를 시작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철교까지 약 5.84km의 구간을 2년여 만에 완공했다. 이 사업을 선거 때마다 치적의 하나로 내세워 표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그런데 청계천 공사는 조선시대에도 중대한 토건사업이었다. 조선 개국 이래 300여년을 방치해 토사가 쌓여 홍수 때 범람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1760년 영조 36년에 연인원 21만5,380명을 동원해 57일간의 공사를 거쳐 이 준설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승정원일기’는 당시 왕과 신하가 청계천 공사의 세부사항 등에 관해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의 비서실 역할을 했던 승정원이 다룬 문서와 사건을 일자별로 기록한 책이다. 현재 1623년부터 1910년까지 288년간의 기록을 담은 3243책이 남아있다. 승정원일기는 분량 면에서 세계 최고의 역사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조가 신하와 나눈 대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 공사에 노심초사했는지 느낄 수 있다. 영조가 오후 2시경 숭문당에 나가 호조판서이자 사도세자 장인인 홍봉한을 비롯해 승지, 기사관(실록 편찬 직책), 기주관(시정 기록 직책) 등과 개천을 파는 준천(濬川·준설과 같은 뜻) 문제를 논의했다.

•영조: 저번에 광통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크다.

•홍봉한: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인가는 필시 대부분 떠내려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영조: 경들이 도랑을 준천하는 일을 담당했으면 좋겠다.

•홍봉한: 신들이 담당하게 된다면 어찌 전력하여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영조: 한양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해도 모래흙을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 하는데 한 번 시험해 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영조: (웃으며)성중(城中)에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합니다.

•기주관 서병덕: 준천의 방도에 대해서 강구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북악이 잘 붕괴하고 동쪽 도랑이 잘 막히니 먼저 북악의 수목을 기르고 동쪽 도랑의 막힌 부분을 깊이 파낸 연후에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 옳은 의견이다.

청계천 준설 공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홍봉한이 성 밖의 물길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뢰자 영조가 이를 윤허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영조: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 오간수문의 역처(役處·군역이나 부역을 치르는 곳이란 의미로 공사현장을 뜻함)가 이미 깊어졌으니 6일 내 한 일이 대단하다. 

•홍봉한: 그저께만 해도 역군이 수문 간에서 몸을 펴지도 못했으나 한 번 구멍을 뚫으니 점차 팔 수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많은 백성의 힘이 하늘을 이긴 것입니다.

•영조: 정말 그러하다.

•홍봉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영조: 괴이한 일이로다. 그들이 흙과 물을 볼 수 있는가?

•홍봉한: 반드시 그들이 가동과 노비를 부역에 보내려는 것이니, 신들이 보내지 말라는 뜻으로 분부를 내렸습니다.

•영조:  그 마음이 가상하다.

청계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영조는 ‘준천사실’(濬川事實)의 편찬을 명했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홍봉한에게 “준천 후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홍봉한이 “그 효과가 100년을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사관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날 희정당에서 영조가 호판, 판윤, 훈련대장 등과 나눈 대화를 승정원일기는 다음과 같이 남겼다.

•영조: 준천 공사는 지금 어디까지 했는가?

•홍봉한: 송전교에서 광통교까지 이미 완료되어 내일 연결될 것입니다. 수표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구간은 너무 넓어 공역이 갑절 어려웠습니다.

•영조: 나는 모래흙의 처리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금번의 일은 매우 잘 된 것 같다.

•홍계희: 옛날에도 하천을 다스린 사례를 신도 들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글로 써서 공사의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데 제목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조: ‘준천사실’로 이름을 정하라. 금번 준천 후에 다시 막히는 일은 없는가?

•홍봉한: 갑을지론이 없는 것은 아니나 100년 내에는 반드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영조: 승지의 의견은 어떤가?

•이사관: 얼마나 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다시 막히는 일은 분명히 없을 것입니다.

•홍봉한: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을 총칭한 말)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갹출하여 사후 준천의 비용에 대비한다면 매우 편의할 것입니다.

•구선행: 홍봉한의 의견과 같습니다. 이렇게 한 연후에 앞으로도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금번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을 만들고 차후에는 이것으로 한계를 삼아 항상 노출되어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조: 표석은 ‘경진지평’(庚辰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하면 유효할 것이다.

왕명에 따라 경진지평이란 글자를 광통교 교각에 새겨 넣고 토사가 글자를 넘지 않도록 관리했다. 실제로 정조 때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토사를 방치한 책임을 물어 준천소(濬川所) 관리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청계천 광통교 교각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경진지평’이란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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