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3] 허위 등 의병 300명 “우리나라에도 영화 ‘300’ 같은 용사들이 있었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3] 허위 등 의병 300명 “우리나라에도 영화 ‘300’ 같은 용사들이 있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5.08 14:04
  • 호수 8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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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병장 허위. 그는 300명의 의병 선발대와 함께 동대문 밖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대한제국 의병장 허위. 그는 300명의 의병 선발대와 함께 동대문 밖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을사늑약 후 전국의 의병들, 경기 양주에 집합…서울 진공작전에 돌입   

안중근 “이천만 동포가 허위 같은 용기 있었다면 국욕 안 당했을 것”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수년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 ‘300’.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의 용사 300명이 페르시아의 20만 군대에 맞서 배수의 진을 치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는 내용의 감동적인 영화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용맹스런 전사들이 있었다. 숫자도 공교롭게 똑같은 300명이다.   

1908년 1월 말, 서울 진공작전 당시 의병 300명이 동대문 밖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려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참패였으나 의병들은 죽는 순간까지 온힘을 다해 싸웠다. 의병을 지휘한 이는 허위(許蔿·1854~1908년)란 인물이다.  

허위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맏형 허형은 한말의 거유로 의병운동가였고, 셋째 형 허겸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위 가족은 일본 헌병들의 추적을 피해 남한과 북한, 중국, 러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허위가 의병 대열에 처음 동참한 것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인 을미의병(1894~1896년) 때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전국 각처에서 항일의병이 잇따라 일어나자 허위도 고향에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1896년 3월 26일 장날에 맞춰 의병을 일으켰다. 허위가 이끈 의병은 지역 군수가 서둘러 소집한 자위군을 손쉽게 물리쳤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에 맞서 고전 끝에 참패를 당했다.

◇고위직 청산하고 의병에 투신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허위는 중앙의 관계로 진출해 성균관 박사,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거쳐 평리원서리재판장에 임명됐다. 이는 오늘날의 대법원장 서리에 해당한다. 허위는 평리원 책임자로서 불의와 구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해 칭송이 자자했다. 1904년 8월 의정부참찬에 임명됐을 때는 학교 건립, 철도와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을 담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자 허위는 일제의 주권 침탈과 재산권 침해, 그리고 온갖 억압행위 등을 규탄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했다. 이 일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4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 7년 간의 관직 생활을 청산했다.

허위는 일본 헌병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며 의병을 모아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친일 매국분자들을 소탕했다.

허위는 이인영(1868~1909년)이 이끄는 의병부대 등과 함께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군을 조직했다. 경기도 양주에 모인 의병은 48진, 1만 여명에 달했다. 이인영이 총대장, 허위가 군사장이 돼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항일전의 합법성을 담은 선언문을 보내기도 했다. 

선공을 맡은 허위는 300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다다랐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군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연발총 무기로 무장한 결사대원이 앞장서 필사의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승총으로는 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각도의 의병들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다. 

서울 진공작전이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는 바람에 본대의 출동이 늦어졌다. 이인영은 후에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하여 그 위중한 순간에 고향으로 돌아갔느냐’ 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국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라고 답했다.

다른 하나는 서울 진공작전이 사전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는 바람에 일본군이 이를 알고 외곽 경비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 동대문 ‘왕산로’, 허위 호에서 따와  

서울 진공작전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허위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재개했다. 허위 등 의병들은 도처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고, 관공서를 습격해 부일 매국 분자들을 처단했다. 경기도 북부지방은 의병부대의 군정 아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위는 군율을 정해 민폐가 없도록 했다. 군비 조달 시에는 군표를 발행해 뒷날 보상해줄 것을 약속하자 주민들도 의병부대를 적극 후원했다. 

허위는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양평에서 포로로 잡힌 의병으로부터 소재지를 알아낸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으나 의연한 자세로 한국 침략을 당당히 성토했다. 

허위는 같은 해 9월 27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형 집행 전 왜승이 명복을 비는 독경을 하려고 하자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안중근 의사는 허위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며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역 교차로에서 동대문구 시조사 삼거리에 이르는 도로의 이름을 허위의 호인 왕산(旺山)에서 따와 ‘왕산로’로 칭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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