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당서 만난 인연 수기, 1등 박양조 시흥시 은계LH7단지경로당회장
경로당서 만난 인연 수기, 1등 박양조 시흥시 은계LH7단지경로당회장
  • 박양조 시흥시 은계LH7단지 경로당 회장
  • 승인 2023.05.15 13:41
  • 호수 8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일 말 한마디 없이 계시다 귀가하는 97세 할머니, 알고보니…”

남자 회장인 내가 위생복 입고 음식 조리 맡아 저녁식사 대접하자

경로당에 어르신 잘 모시기 바람… 어르신 “저녁까지 챙겨줘 고맙다”

박양조 시흥시 은계LH7단지 경로당 회장
박양조 시흥시 은계LH7단지 경로당 회장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한파도 물러가고 낮에 부는 바람 속에 봄기운이 느껴진다. 경기 시흥시 은행동의 은계LH7단지아파트경로당은 문을 연 지 5년째 됐지만, 코로나로 문을 닫은 2년 6개월을 제하면 실제 운영은 2년여 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이 경로당의 3대 회장으로 일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돼간다.

은계LH7단지아파트는 원룸, 투룸의 소형 평수 장기임대아파트로 9개동 1400여세대로 지어졌다. 거주하는 분들은 장애인이거나 국가유공자, 유공자의 가족,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또 연세가 많고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생활 형편이 열악한 편이다. 혼자 살며 나이도 많고 게다가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 짚고, 보행보조기를 끌며 경로당을 찾아 하루를 보내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경로당에 등록된 회원수가 110여명이고 활동 회원도 80여명에 달한다. 시흥시 경로당 평균 회원수가 30여명인 것을 감안하면 3배 이상 많은 편이다. 경로당의 주된 목적은 이런 노인분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빠듯한 예산에 뜻있는 회원들의 찬조금을 모아 매월 15회 가량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을 잘 보는 요령이 필요하다. 먼저 아파트에서 지원해주는 돈으로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 우시장 단골집에서 고기를 구입한다. 경로당 노인들에게 봉사한다는 취지를 잘 설명해서 소고기‧돼지고기와 돼지머리‧족 등 기타 부산물 등을 값싸게, 그것도 양도 많이 지원 받아 끼니마다 고기반찬과 고깃국을 드실 수 있도록 했다. 고기가 충분하니 다른 음식은 저렴한 식자재로 충분하다. 또 매년 초겨울 회원들이 힘을 합쳐 김장도 넉넉하게 해뒀다. 김치를 포함해 반찬을 4가지 이상 제공해 영양도 골고루 챙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하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간단히 저녁을 드시고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즐겁게 식사를 하시는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 일에 보람을 느끼고 힘든 줄도 모른 채 하루를 보낸다.

회원 중에는 유독 특별히 관심이 가는 한 할머니가 있다. 97세 강 할머니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외에는 아주 건강한 편이다. 

강 할머니는 매일 경로당에 나와서 꼭 정해진 자리에 앉아 오후 6시에 댁으로 돌아간다. 옆에서 말을 걸지 않으면 하루 종일 한마디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다른 회원들은 대화도 하고 화투 등 각종 놀이 등으로 시끌벅적하지만 강 할머니는 잠시 누워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TV만 주시하며 움직임이 없다. 회원들이 많다 보니 사소한 입씨름에 바람 잘 날 없는 경로당에서 ‘강 할머니는 참으로 특이한 분이구나’하며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 회원들을 통해 할머니가 팔순을 앞둔 아들, 70대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고 세 사람이 모두 합쳐도 겨우 몇십 만원의 생활비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세 분 모두 나이가 많다 보니 끼니를 챙기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듣게 됐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저녁 식사를 보다 잘 챙기기로 마음 먹었다. 

남자 회장인 내가 음식 솜씨가 있는 편이라 매일 위생복을 입고 식사도우미 한 분과 함께 음식 조리를 맡고 있다. 

강 할머니의 간식과 저녁까지 준비해서 대접해드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경로당 내에서 80~90대 연로한 어르신들을 잘 모시자는 바람이 불게 됐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소정의 금액을 기부하며 식사를 만드는데도 적극 참여했다. 회원들 역시 넉넉한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로효친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에 나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 할머니와 마주쳤다. 강 할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장님이 저녁까지 밥을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잠시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강 할머니의 손을 꼭잡아 드리며 이렇게 답했다.

“고기 반찬 매일 해드릴테니 오시기만 하세요.”

간식이 든 가방을 메고 귀가하는 강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되뇌어본다.

강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