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전통色이야기 36] 黃衣는 중국의 환관이 입던 옷으로 환관 상징
[한국의전통色이야기 36] 黃衣는 중국의 환관이 입던 옷으로 환관 상징
  •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23.05.30 10:09
  • 호수 8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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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늠식(黃衣廩食)

황의(黃衣)는 고려시대 임금의 옷, 어린이옷으로 기록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황내취(黃內吹: 군악을 연주하던 취타 악대)가 입는 옷, 기우제 때 무기일(戊己日)에 젊은이가 입는 옷 등으로 기록되었으나 대한제국 이전에는 공복으로 황색을 입을 수 없었다. 

◎견마위(牽馬衛: 왕의 가마나 말을 끌던 사람) 등의 복식이 모두 황색인데, 저쪽에서 만약 이것을 보고 황제의 옷이 황색인데 이들이 어찌 이것을 입었는지 운운하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 갓은 그대로 착용하고 옷은 흑색으로 바꾸는 것이 옳다.<인조 15년> 

◎몽고와 북경사람의 얼굴 생김새는 희미한데도 모두 황의(黃衣)를 착용했으며, 북경에서 종사하는 많은 사람도 모두 황의를 입었는데 만든 견본은 만주사람과 매우 달랐습니다.<영조 33년> 

◎몽고의 복색은 어떠하던가? (......) 많은 사람이 황의(黃衣)를 입는데 두루마기에 삭발을 해서 중과 같았습니다. (......) 황색(黃色) 옷은 아직 금하지 않는다하던가? (......) 몽고는 금하지 않았습니다.<고종 10년> 

◎신련(神輦)을 메고 모실 때 등짐장수의 복색은 어떠했는가? (......) 모두 황건(黃巾)-황의(黃衣)를 착용했습니다.<고종 37년> 

늠식은 국록을 받는다는 뜻

황의(黃衣)는 중국의 환관이 입는 옷이므로 곧 환관을 가리킨다. 늠식(廩食)은 정부 부조미(扶助米), 또는 부조미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황의늠식(黃衣廩食)은 곧 나라의 부조미(국록)를 받아먹으며 궁중에서 일하는 내시를 가리킨다. 

◎한나라와 당나라 초기에도 옛 제도에 따라 궁중의 황의(黃衣)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에게 정권을 맡겨 황제를 폐하거나 세우는 일을 장악하였으니 이 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성왕(聖王)은 황의(黃衣)를 수십 명을 두었어도 궁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일만 하게 했을 뿐 총애하여 관작을 내리고 품계를 올렸다는 일은 듣지 못했습니다<성종 13년> 

◎내관은 황의늠식(黃衣廩食)하며, 궁문을 지키고 물 뿌리고 비로 쓰는 일을 하는 데에 불과할 뿐인데, 내관 최홍은 임금을 배척하고 극히 함부로 굴어 버릇이 없으니 즉시 잡아다 문초하여 각별히 엄단하라.<경종 3년> 

◎당 태종이 제도를 정한 내시는 황의늠식(黃衣廩食)하며 궁문을 지키고 명을 전하는 일만 할 뿐인데 중종 때에는 비록 1000여 명이 있었지만 비의(緋衣: 고위관복)를 입은 자는 오히려 적었습니다. 현종 때에 이르러서는 환관 고력사를 총애하여 채용하였는데 그 뒤 환관의 재앙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영조 1년> 

◎환관의 일은 본래 황의(黃衣)쇄소(灑掃: 청소)하는 역할인데 지나치게 의복을 사치하고, (......) 백성이 사는 곳에 출입할 때에도 뒤따르는 종복들이 지나치게 많고, 조정신하와 같이 큰소리로 꾸짖는 등.<영조 21년> 

황의(黃衣)는 오늘날의 공무원에 비유할 수 있고, 늠식(廩食)은 국록(國祿)에 비유할 수 있다. 오늘날 국록을 먹는 공직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잃고, 온갖 부정한 짓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용어이다.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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