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우유 배달과 고독사 예방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우유 배달과 고독사 예방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3.06.05 11:30
  • 호수 8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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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서울 옥수동·금호동서 시작된

독거노인 댁 우유 배달은

고독사 예방에도 톡톡한 역할

20년간 후원하는 사람도 교회도

너무도 따뜻한 사랑의 실천

소설가 백수린은 그의 수필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서 서울의 중심이지만, 언덕배기 성곽 근처 좁다란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단독주택에 살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련되고 매끈한 도시의 모습과는 딴판인 이 지역은 전쟁 이후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이 성곽 아래에 무허가 주택을 지으면서 형성된 곳이다. 문화재인 성곽 근처라 재개발도 어려운 곳이다 보니 도심이라도 나무와 새가 많고, 노인들이 주로 살고 있고, 비탈지고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마다 낡고 납작한 집들이 어깨를 서로 걸치고 늘어서 있다. 

나는 90년대 중반부터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수필에는 그곳이 어디라는 구체적인 동네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내가 남편의 정치일을 돕기 위해 수없이 누볐던 신당동 성곽길 옆의 동네임이 분명하다. 

매봉산 자락의 이쪽 편은 중구의 약수동과 신당동이다. 그때만 해도 달동네였는데, 지금은 재개발이 다 되어 대로변에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매봉산 저쪽 자락은 성동구의 옥수동과 금호동이다. 옛 기억으로는 그쪽에도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오래된 작은 집들이 꽤 많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최고급 아파트와 아직도 납작하고 허름한 달동네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옥수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강연 요청이 왔다. 금호역에서 옥수동 언덕배기를 향해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차폭이 2미터도 안 되는, 겨우 소형 승용차 한 대 지나갈 만한 좁은 언덕길이 나왔다. 

신당동 살 때 이런 길을 지나다닌 적이 많았던 나는 당황해 운전대를 잡고 벌벌 떨었다. 옆에 앉은 남편이 “괜찮아, 갈 수 있어”를 여러 번 외치다 “긁히면 내가 책임질게”라고 했다. 아마 혼자였으면 오도가도 못하고 엉엉 울 뻔했다.

강연 시작보다 2시간쯤 일찍 도착해 근처 카페에 앉아 있으면서, 그 교회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동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 배달을 20년째 하는 교회였다. 목사님의 처남이 중소기업을 하며 3년간 매달 200만 원씩 후원을 한 게 그 시작이었다. 

처음엔 매봉산 자락 옥수동, 금호동 독거노인 100여 가정에 우유 배달을 했는데, 지금은 서울 시내 1000여 가정에 배달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한 달에 2100만원, 일 년에 2억5000만원이 든다. 앞으로 5000여 가정에 우유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우유 배달은 이제 독거노인의 고독사를 예방하는 중요한 임무를 갖고 진행되고 있다. 우유 배달을 시작한 지 15년째 되던 2015년엔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구제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사업을 하는 데는 후원자가 정말 많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 가난한 광희동 집 네 아들 중 막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수차례 사업에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설 때마다 목사님의 축복 예배를 부탁하는 신실한 청년이었다. 

그는 2012년부터 우유 배달에 재정적인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아직 사업이 안정적이지도 않았지만, 그의 후원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배달 애플리케이션 하나를 만들어 시작하더니 그의 사업이 불처럼 일어나 현재 자산 1조원의 회사가 됐다. 

이는 ‘배달의 민족’을 만든 김봉진 대표 이야기다. 투자회사 골드만삭스는 김 대표의 회사 우아한 형제들에 투자를 하는 과정에서 그의 우유 후원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골드만삭스도 직접 우유 배달 후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함께 우유배달을 지원하는 우유 회사에서는 이 내용을 광고로 만들어 이름있는 외국 광고제에 출품해 큰 상을 타기도 했다. 어떻게 200ml 우유 하나를 배달하는 일로, 고독사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게 외국인심사위원들의 관심사였다.

통계에 따르면, 배우자와 사별하고 자녀와 떨어져 사는 65세 이상의 독거노인이 전국에 약 159만명 정도이다. 게다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독거노인이 늘어나고 있는데, 숨이 멎고 나서 사흘, 72시간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을 ‘고독사’라 말한다.

우유배달원이 현관문에 걸린 우유 바구니에 우유 두 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혹시 아프신 건 아닌지 안부를 묻거나, 주민센터에 신고를 한다. 그런 방법으로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들의 고독사를 막아주는 것이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의 역할이다.

옥수동중앙교회 호용한 목사님의 이런 이야기는 미담을 넘어 고독사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쉽고도 따뜻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 세상은 험악하기만 한 것 같아도 여전히 선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잘 지탱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강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늦은 밤길이 두렵지 않고 훈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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