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5] “고구려 영양왕, 말갈족 1만명 이끌고 수나라 기습 공격”…수·당은 왜 고구려를 침략 했나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5] “고구려 영양왕, 말갈족 1만명 이끌고 수나라 기습 공격”…수·당은 왜 고구려를 침략 했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6.05 13:26
  • 호수 8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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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4차례 고구려 정벌에 실패… 목 매 자살하고 수나라도 멸망

당태종, 연개소문에 막혀 좌절… “고구려 침략하지 마라” 유언 남겨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중원대륙을 통일한 강대국 수(隨)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唐)나라는 왜 동쪽 변방에 있던 고구려를 칠 생각을 했을까. 

수나라의 수문제(隋文帝·541~604년)는 589년 중국을 통일했다. 중국 북쪽의 돌궐·거란·말갈 등 유목민족들은 수나라에 굴복했고, 한반도의 백제, 신라도 눈치껏 조공하며 엎드렸다. 유일하게 고구려만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고구려도 첨부터 수나라에 대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도 받는 등 화친을 유지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론 정찰병을 수나라에 몰래 파견하는 등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수문제는 이를 알고 고구려에 “겉으로 화친하며 안으로 전쟁 준비를 한다”고 비난하며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서를 보냈다.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 침공

선수를 친 것은 고구려였다. 598년 2월 영양왕(嬰陽王·?~618년)은 말갈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도발 배경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수나라가 고구려와 가깝게 지내던 말갈, 거란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치려할 것이란 확신을 영양왕이 가지면서 이에 대처하려고 먼저 말갈을 회유해 수나라를 치게 됐다는 것이다.  

영양왕이 선공을 날리자 수나라는 같은 해에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첫 번째 출동에선 기상과 군량미 등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마철에 군량미 운반이 순조롭지 못했고, 바다를 통한 수군 역시 풍랑으로 대부분 배를 잃었다. 수나라 군사 10명 중 9명은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수문제는 이로 인해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다.

수문제에 이어 아들 수양제(隋煬帝·569~618년)가 권좌에 올랐다. 수양제 역시 동생을 죽이고 황제가 된 패륜아로 ‘폭군의 대명사’로 불린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찾던 중 수양제는 우연히 고구려가 돌궐에 사신을 보낸 걸 알게 됐다. 그는 고구려가 돌궐과 가깝게 지내는 걸 원치 않았다. 수양제는 이 일과 관련해 “고구려 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돌궐을 이끌고 가 토벌하겠다”고 협박했다. 역대 고구려왕은 한 번도 입조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수양제의 지시를 무시해버렸다. 

그러자 수양제는 611년 조서를 내려 고구려 공격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이듬해 자신이 손수 말안장을 꾸려 대열의 맨앞에 서서 성문을 나섰다. 이때 전투병이 자그마치 100만명이었고 병참부대까지 합치면 300만명에 달했다. 세계 전쟁사에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다. 대열이 무려 960리에 달해 선두가 나팔 불면서 출발한 지 40일 만에 후미가 움직였다고 한다.

출동은 요란했으나 수양제의 300만 대군은 고구려의 첫 관문인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했고, 바다를 통해 진격하던 수나라 수군 역시 평양성에서 몰살을 당했다. 패인 중 하나가 수양제의 ‘1인 통제’였다. 즉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려 모든 결정을 먼저 보고한 뒤 그 결정에 따르게 해 장수들이 전투 상황에 맞는 신속한 대체가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두 번째 고구려 정벌은 수나라 내부의 반란이 일어나 군대를 철수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수양제는 반란군을 진압한 뒤 613년 세 번째 정벌에 나섰다. 고구려는 수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도 지친 상태라 하는 수 없이 수나라에 항복의사를 밝혔다. 수양제는 이를 받아들이며 영양왕이 입조해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태묘에 와서 잘못을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영양왕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수양제는 614년 네 번째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부하들의 집단행동으로 중단됐다. 수양제가 돌궐족에 포위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부하들이 ‘더 이상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않으면 죽기 살기로 돌궐과 싸워 황제를 보필하겠다’고 하자 수양제가 그 말에 따른 것이다. 

겨우 목숨을 구했으나 수양제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에 불만을 품은 반란군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결국 반란군에 잡힌 수양제는 황제의 체통을 지켜달라고 한 후 허리띠를 풀어 그것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이로써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 후유증으로 40년 만에 멸망했고 뒤를 이어 당나라가 들어섰다. 

◇고구려 후예 잊지 말고 중국에 당당해야

당나라의 2대 황제인 당태종(唐太宗·598~649년)은 국내 질서가 자리 잡히자 고구려에 눈을 돌렸다. 그 역시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내고 황제에 오른 패륜아이다. 당 태종은 신라로부터 ‘고구려가 막고 있어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침공도 자주 받으니 도와 달라’는 호소를 듣고는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눈부신 활약과 안시성 함락의 실패 등으로 전의를 상실한데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후퇴하면서 늪지대를 건너는 와중에 수많은 부하를 잃은 당 태종은 4년 뒤 눈을 감으면서 “고구려 침공은 그만 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고구려는 이처럼 강한 나라였다. 고구려의 후예가 우리들이다. 중국의 시진핑은 머릿수와 땅덩어리만 믿고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등 망발을 하고 있다. 적은 숫자로 중원의 대륙을 떨게 한 광개토대왕은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는 한 번 기가 꺾인다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참는다면 더한 요구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한·중 경제 및 외교안보에서 시진핑의 비위를 거스를까 전전긍긍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우리는 중국 왕조를 갈아치운 대고구려의 후예란 사실을 잊지 말고 대중외교에 대처해야 한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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