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지성의 꽃, “白壽宴 믿을 수 없어요”
100년 지성의 꽃, “白壽宴 믿을 수 없어요”
  • 관리자
  • 승인 2006.08.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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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여고, 정태숙 동문 백수연 베풀어

‘모교와 동갑’ 월례행사 등 빠진적 없는 열성파

앳된 소녀 적에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수줍게 핀 꽃처럼 검정색 윗도리 밖으로 살짝 드러난 셔츠 깃, 꽃장식이 달린 세련된 베이지색 모자 아래 연분홍색 홍조를 띤 얼굴이 참으로 곱다.

 

누가 저이를 올해 백수를 맞는 초고령 할머니라 할까.

 

지팡이도 부축하는 사람도 없이 박수갈채 속으로 들어서는 정태숙 할머니를 바라본 소감이다.


오는 2008년이면 개교 100주년을 맞는 경기여고 동문회가 마련한 이색적인 백수연(白壽宴)이 지난달 22일 이 학교 매화관 3층에서 있었다.

 

이날 행사는 경기여고 동문회원들의 아주 특별한 선배이자 최고령자인 정 할머니의 백수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1908년 설립해 100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3만7000여명의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지만 동문 회원을 위해 백수 기념식이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 할머니는 경기여고 동문회 ‘경운회’의 월례행사와 정기총회 등의 모임에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성파로 손꼽힌다. 동문들이 정 할머니의 건강과 한결같은 열의에 경외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강단에서 후배를 직접 가르친 선생님으로서, 보육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본 사회사업가로서, 여성교육에 앞장선 선구자로서 정 할머니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후배들의 존경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경기여고와 일생을 함께 할 연분을 타고난 것일까. 1908년 4월 1일 경기여고의 모태 관립한성고등여학교가 창설됐고, 정 할머니는 그 다음달 5월 27일에 태어났다. 학교와 동갑나기로 나란히 한 세기 삶을 이어왔으니 후배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선배다. 정 할머니가 모교에 애착을 갖는 데에는 동갑내기 학교라는 이유도 크다.


정 할머니가 걸어온 배움의 길은 특별하다. 열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해 시집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예정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선진의식을 지녔던 시아버지가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16살에 경기여고에 입학한 정 할머니는 1930년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그 이듬해 초등학교 강단에 서는 것으로 교육자로서 인생이 시작됐다.


스물한 살에 지금은 70대 중반이 된 큰 아들을 낳고, 둘째 아들도 낳아 한참 커갈 무렵 남편과 사별했다. 그때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여자 혼자 살아가는 일이 순탄치 않은 시절이었지만 무엇도 정 할머니의 열정과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첫 부임지 영정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서대문에 자리한 미동초등학교, 심상초등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정 할머니는 교직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선진문물에 일찍 눈을 떠 교육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힘들게 모은 사비를 털어 일본의 학사를 시찰하기도 한다.

 

1937년, 일본에서의 생활은 정 할머니의 의식에 교육에 대한 더욱 강렬한 열의를 불어넣었다. 그 후 다시 국내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틈을 내어 일본으로 건너가 선진교육제도와 문화를 섭렵했다.


1953년에는 사재를 들여 ‘숙녀학원’을 세운 그는 8년 동안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들을 대상으로 당시에는 개념조차 생소한 ‘신부수업’을 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부수업이 웬 말이냐’는 비난이 있을 법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르쳤다.

 

여성들에게 배움은 배고픔보다 더 절실하다고 보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강단을 떠날 즈음인 1960년에는 재단법인 ‘에덴보육원’ 원장을 맡아 고아들을 가르치고 돌보며 다시 11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예지원과 서울시 사회복지원에 나가 여성의 인성교육에도 힘써왔다.
이날 식장에서는 정 할머니의 지나온 삶이 빛바랜 사진을 통해 슬라이드로 상영됐다. 슬라이드 소개를 맡은 이는 김용완(74) 전 경기여고 교장.

 

김 전 교장도 경기여고 39회 졸업생이다. 게다가 김 전 교장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정 할머니를 담임선생님으로 만나 지금까지 각별한 사제지간을 지켜오고 있다.


김용완 전 교장은 “초등학교 시절 도지사 상을 받게 됐지요. 큰 상을 받는 기쁨도 잠시, 입을 옷이 변변찮아 고민하고 있던 제자에게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우며 예쁜 스웨터를 떠서 입혔던 선생님이셨지요”라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일화를 소개했다.


‘경운회’ 문영혜(65) 회장은 “정태숙 선배님은 10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학교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며 “매사에 열성을 갖고 건강하게 생활하시는 모습이 3만7000여 동문은 물론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교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태숙 할머니는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한 후배들에게 너무 고맙다”며 “후배들 모두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예쁜 생일 모자를 쓰고 촛불을 끄는 정 할머니. 아주 특별한 백수연을 지켜본 50여명의 동문들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한 동안 정 할머니 주변에서 떠나지 못했다.


 이미정 기자 mjlee@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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