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안필준 회장 추모사
故 안필준 회장 추모사
  • 관리자
  • 승인 2009.09.04 16:37
  • 호수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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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간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노인 생활 안정된 사회건설’이 고인 유지
장기요양보험법·기초노령연금법 등 ‘노인3법’ 제정 이끌어
60대 고령에도 노년학 매진…노인사회 이끈 진정한 ‘거목’


너무나도 충격이 큽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났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안필준 회장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날 저녁, 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늠름하고 믿음직한 모습으로 전국 520만 노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온갖 정열을 쏟아 헌신하던 우리의 최고지도자를 한 순간에 잃은 충격 때문입니다

고인께서는 전국 16개소 연합회부터 5만5000여개소의 경로당까지 대한노인회 산하조직 사업현황을 직접 점검하고 독려하기 위해 쉴 사이 없이 전국을 순회하는 격무에 시달리다 과로 순직하셨다는 점 때문에 더욱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故 안필준 회장이 지난 7년간 우리나라 노인사회를 위해 이룩한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장기요양보험범과 기초노령연금법을 비롯한 ‘노인3법’이 입안되고 제정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노인일자리사업에 대한 국가지원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고인이 국회와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시키며 온갖 정열을 쏟았던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인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고인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풍요로운 사회를 구가하게 된 것은 바로 오늘의 노인들이 과거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노력한 성과인데, 이제 와서 사회가 노인을 홀대한다는 것은 도덕적·윤리적 측면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고인의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고인이 노인의 소득보장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해 지난 수년간 동분서주하며 정치권을 강하게 압박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고인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많은 노인이 국가로부터 생계비의 일부나마 지원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일할 욕구와 능력이 있고, 일하지 않으면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는 노인이 적지 않습니다. 고인께서는 2003년 대한노인회장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이러한 노인들의 딱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여야의 정치지도자 및 정부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설득시켰습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4년부터 전국 248개소에 노인취업알선센터가 개설돼 매년 3만명 이상의 노인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고인은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제정과정에도 깊이 개입했습니다. 핵가족화가 심화되고 맞벌이 가족이 증가함에 따라 치매와 중풍으로 고통 받는 노인들의 수발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됐습니다. 고인은 2001년 일본에서 노년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직후부터 이러한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노인수발보험법의 제정을 제창하기 시작했고, 끈질기게 그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2007년, 드디어 고인의 염원과 노력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고인은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인 경로효친사상이 날로 퇴색되는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효행은 인간의 기본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윤리덕목이 경시되는 현실을 개탄하던 고인은 뜻을 같이하는 몇몇 인사들과 협력해 입법부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지난 5월 드디어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고인은 올해를 봉사의 해로 정하고 전국 노인회 조직으로 하여금 각기 해당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전개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고인은 항상 노인이 웃어른으로 대접 받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에게 솔선수범 봉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예절교육을 하고, 어린이들을 범죄의 손아귀에서 보호하는 어린이 유괴·성범죄 추방국민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등 대한민국의 희망이요, 새싹을 노인들이 나서 지키는 운동을 전개해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고인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1993년 봄 어느 날, 필자와 서울 여의도 63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노인문제에 대해 의견교환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고인은 “여생을 노인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생각”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전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조만간 미국 유학길에 오를 생각”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당시 고인은 6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에서 4년여에 걸쳐 노인관련 학문을 전공,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귀국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고인께서는 “우리나라 노인복지는 이제 겨우 주춧돌을 놓았을 뿐”이라고 규정하며, “노인권익신장을 위한 운동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늘 “노인들의 생활이 안정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목표가 돼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고인은 유명을 달리 했지만 그의 숭고한 뜻은 우리나라 노인생활이 안정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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