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22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22
  • 관리자
  • 승인 2009.10.09 14:58
  • 호수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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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동 회장, 청와대 강권으로 중도낙마
표면에 원흥균 내세우고 실질적인 회장 권한 행사
청원서 보내며 분위기·여건 조성했으나 복귀 무산


1981년 8월 초순, 이규동 회장은 필자에게 “대통령이 내일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이오니 서울지역 경로당 노인 1만명 이상을 귀국하는 길목인 김포가도에 동원시키라”고 했다. 필자는 즉석에서 반대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노인들을 동원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이냐고 대들었다. 젊은이들의 단체도 전혀 동원되지 않는데 왜 노인들이 앞장서야 되느냐고도 말했다.

심복부하들의 부정행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이 회장의 태도를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던 터라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칠었던 모양이다. 부회장과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면박을 주었기 때문에 이규동 회장은 기분이 몹시 상했고, 필자 역시 반대는 했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 의견충돌에도 불구하고 이규동 회장 재임시, 그리고 그 후임인 이 호 회장체제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마다 서울지역 경로당 노인들이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가도에 동원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1982년 10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시, 그가 출국할 때 또는 귀국할 때 이를 환영하기 위해서 1만여명의 노인을 동원했고, 1983년 10월 대통령이 서남아 순방길에 올랐다가 미얀마에서 아웅산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동일한 행사가 반복됐다. 이규동 회장은 자기 사위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고령의 노인들을 동원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인데 당시의 독재체제하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국하는 행동으로 간주됐다.

이규동 회장 재직 중 대한노인회 지방조직인 시도연합회나 시군구지회는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각별한 처우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회 중에는 독자적인 사무실이 없어 셋방살이를 하는 곳도 적지 않았는데 이규동 회장 취임 후에는 노인회 건물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예산을 세우는 자치단체장들이 많이 나타났다. 또 지회의 행사비 또는 운영비를 자청해서 지원하는 자치단체장도 적지 않았다. 과거에는 별반 행해지지 않았던 경로잔치가 수시로 곳곳에서 개최되는 즐거운 현상이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지회장이나 경로당 회장들 중에는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하거나 중앙회장의 뜻이라는 등의 핑계를 대며 시장이나 군수 등 해당지역 기관장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경우도 적지 않다.

한편 청와대는 대한노인회가 권력을 빙자해서 너무 많은 물의를 일으킨다고 판단했는지 1982년 5월 12일, 민정수석비서관을 노인회에 보내 이규동 회장에게 대한노인회에서 즉시 손을 떼도록 권고함과 동시에 그간 노인회가 권력을 빙자해서 거둬들인 상당액에 달하는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전액 반환시키라는 조치를 취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서는 장인으로 인해서 계속 사회적 물의를 빚을 경우 자신이 친인척관리를 잘 못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반환한 돈은 대한노인회 공식장부에 입금됐던 OO억원 뿐이었다. 회장과 그 측근들이 대한노인회의 명의를 이용해 편취한 이권관련 수입금 또는 찬조금 등에 대해서는 그대로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이규동 회장은 청와대의 강권에 의해 1982년 5월 12일 회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규동 회장 재임 시의 부회장으로는 하두철·원흥균·장남천 등 세 사람이었다. 그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신임회장을 선출할 때까지 부회장 중 한 명이 회장직무대행이 돼야 했다. 순서대로라면 수석부회장인 하두철 박사가 돼야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규동 회장은 원흥균 부회장을 회장직무대행으로 지명함과 동시에 자신은 자청해서 명예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원흥균 부회장은 이 호 씨가 회장으로 선출된 1982년 9월 하순까지 회장직무대행을 수행했다. 이 기간 중 중앙회의 내부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이규동 회장으로서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원흥균을 표면에 내세워 놓고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자신이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회장직에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위해서 다각적인 노력을 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이규동 회장이 물러나고 약 1개월이 지나면서 청와대에는 그를 회장직에 복귀시켜 달라는 청원서가 전국 각지의 경로당 노인들로부터 하루에도 1000여 통씩 계속 배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청원서의 내용은 모두가 대동소이한 것들이어서 누가 봐도 이 탄원서들을 순수한 민의의 반영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하루건너 한 번씩은 반드시 회장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회 운영에 관한 사항들을 직무대행에게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이규동 회장으로서는 전국 노인들로부터 청원서가 쇄도하면 회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매사는 그의 뜻대로 되지 못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서는 친동생인 경환씨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 처가의 가족들까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규동 회장이 대한노인회장으로 복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이규동 회장은 자신의 사위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회장직으로 복귀하려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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