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23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23
  • 관리자
  • 승인 2009.10.16 17:04
  • 호수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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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 회장 시대… 그가 노인회 들어온 배경
이규동 명예회장 제청·청와대의 권고로 회장직 취임
명예회장과 의견충돌 의식해 취임 후 회무에 무관심


이 호(李 澔) 회장은 1982년 9월 25일부터 1988년 9월 24일까지 만 6년간 대한노인회장으로 재임했다. 1914년 경북 영천에서 천석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2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는 경성고등검찰청 검사, 이승만 대통령 재임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 육군본부 법무관, 국방부차관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주일한국대사, 대한적십자사총재 등을 맡겼고,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국정자문위원, 국보위 의장을 역임하는 등 한평생 권력과 타협하며 화려한 생을 누린 인물이다.

이 호씨가 대한노인회장으로 취임한 배경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작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장악을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국보위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그의 도움을 받은 바 있었다. 그 보답으로 무엇이든 감투를 하나 마련해줘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다.

한편 이규동 회장은 원흥균을 회장직무대행으로 앉혀 놓고 4개월간이나 계속해서 자신이 회장직에 복귀하고자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귀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2년 9월 25일 열렸던 임시총회의 회의록을 보면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날 원흥균 직무대행의 개회사에 이어 등단한 이규동 명예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다.

“나는 그동안 원흥균 회장직무대행을 내세워 일을 해왔다. 그간 이사회에서는 두 차례씩이나 저의 사표가 모두 보류됐고, 총회에서도 저의 사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20만명에 가까운 노인들이 청와대에 나의 복귀를 진정한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의논해 본 결과 내가 일선에 다시 복귀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나는 후임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장관도 지내고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지낸 이 호(李 澔)씨를 생각해 보았다. 대통령께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서도 그분이면 무방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 호 선생을 차기 회장으로 모셨으면 하는데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했다.

이에 모두가 박수로써 그의 회장취임을 환영했다.

결국 총회에서는 이규동 명예회장의 제청을 받아들여 이 호 회장 시대가 개막됐다. 이 호 회장은 청와대의 권고에 못 이겨 대한노인회장직에 취임하기는 했으나 그 자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국보위를 설치했을 때 그 의장직을 맞는 등 정권장악 과정에서 적극 협력한 공로를 인정해서라도 국무총리 자리 정도는 자기 몫이 돼야 할 것으로 생각 했던 것 같다.

그는 회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회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규동 명예회장이 그의 심복인 직원들에게 지시해서 모든 회무를 처리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자기가 섣불리 나서봤자 이규동 명예회장과 의견충돌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규동 명예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러나는 1988년 2월까지 계속해서 대한노인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이 호 회장은 허수아비 회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호 회장이 취임 후 처음 행한 행사는 1982년 10월말 열흘 간 롯데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 개최한 가훈전시회다. 이 행사는 이 호 회장이 취임한 이후에 개최되기는 했으나 이미 연초에 이규동 명예회장과 김철호, 필자 등이 결정한 사업이었다.

이 행사는 규모와 자금 면에서 대한노인회가 창립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행사였다. 우리 노인회가 이와 같은 행사를 하게 된 목적은 노인들이 전통문화선양에 앞장서야 된다는 취지에서였다. 가훈전시회에는 전국에서 3000여점의 가훈이 출품됐고, 이때 출품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비와 작품제작에 소요된 비용을 지급했다.

이 호 회장의 취임 후 두 번째 행사는 1983년 5월 8일 어버이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전국 효자효부 및 착한어린이에 대한 표창장 수여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전국 각시군구에서 효행자 1명, 착한 어린이 1명씩을 선발, 표창했는데 이에 소요된 경비는 삼성그룹과 동아건설에서 각각 3000만원씩, 태평양화학이 4000만원, 롯데그룹이 1억원을 지원했다. 경비조달에는 이규동 명예회장이 앞장섰다.

이날 행사에서 이 호 회장의 개회인사에 이어 이규동 명예회장과 이해원 복지부 장관의 축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간 대한노인회에서 2년간에 걸쳐 행해왔던 효자효부 및 착한 어린이 표창사업은 1985년부터 보건복지부가 동일한 성격의 행사를 시작함에 따라 중복을 피하기 위해 중앙회 행사는 중단하고 시군구지회에서만 하도록 했다.

이때 대한노인회에서 시작한 이 효자효부표창사업은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몇 년 후 삼성그룹과 현대그룹도 효행자표창사업을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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