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31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31
  • 관리자
  • 승인 2009.12.04 17:02
  • 호수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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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현 회장이 취임 초기 3년간 추진한 사업
백창현 회장은 1994년 2월 28일 열렸던 정기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돼 2000년 2월 22일까지 만6년 동안 대한노인회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새로운 회장이 선출될 때마다 중앙회의 사회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선문제에 관해 신임회장에게 조언을 해왔으나 백창현 회장에게는 아예 그러한 노력마저 포기했다. 백창현 회장 역시 인선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조언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당선되고 10여일이 경과한 어느 날 사무국을 통해서 새로이 선출된 부회장과 선임이사의 명단이 발표됐다. 유명인사는 이윤숙 교수, 민경천 대한삼락회장, 이외윤 평생교육원 이사장뿐이었고, 대부분 강남지역에 거주하는 그의 친지들로 구성됐다. 대한노인회 중앙회는 창립 이후 가장 수준이 낮은 임원진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신강순 총무국장을 사무총장으로 승진시켜 많은 역할을 부여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화장의 업무능력이 부족할 때는 보좌진이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강순 사무총장은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와 관련된 일을 비롯해 대외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회장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했다. 필자 역시 그가 회장으로 당선된 후 노인회의 운영 또는 노인복지정책과 관련해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만나는 일이 있을 때는 항상 동행해 회장 발언의 미진한 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1995년 5월 9일, 대한노인회 중앙회 임원을 비롯해 노년학 관련 학계인사 및 기타 노인단체장 등 62명은 보건복지부 김양배 장관의 안내로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오찬회에 참석했다. 메인 테이블에는 김영삼 대통령 내외분, 백창현 회장과 필자, 그리고 김양배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 전국노인단체연합회 김용성 회장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경로당 이용 노인 중 생계 때문에 고통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노인들의 소득보장과 관련된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주문했다. 무갹출노령연금의 성격을 띤 노령수당제도 및 노인취업정책 개발방안에 관한 필자의 연구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적극 검토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는 그 보고서를 김양배 장관에게 건네며 대책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했다. 이후 보건복지부는 저소득 노인에게 노령수당 명목으로 월 3만원 내외를 지급했다.

백창현 회장은 전국 노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자원봉사활동과 취업알선센터의 운영현황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치매는 가족적인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앞으로도 이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 대책을 세워나가겠다”고 했다.

백창현 회장 재임 중에는 임원진의 구성이 지나치게 약체였다는 점 때문에 찬조금을 얻어올 능력도 없었고, 수익사업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회장이 재력을 과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그의 임기 6년간 찬조금을 내는 사람은 별반 나타나지 않았다.

노인회 운영비의 일부를 자부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 보았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이에 따라 주요 세입은 보건복지부의 국고보조금 1억2000만원과 은행에 넣어놓은 기금 10억원에서 나오는 이자 7500만원, 그리고 약간의 잡수입을 더해 연간 2억5000만원 내외의 예산으로 중앙회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과거부터 연례적으로 해오던 사업인 ‘노인생활’의 발간, 노인취업알선센터와 노인공동작업장 운영, 전국 시군구지회장의 연수교육, 전국노인게이트볼대회 등은 계속했다.

그 외에도 비예산사업으로 노인자원봉사활동의 활성화, 노인복지상조회 운영의 내실화, 경로당 프로그램의 건전화를 위한 지도감독 강화, 그리고 회원배가운동 등은 꾸준히 지속됐다.

이러한 사업은 대부분 신강순 사무총장 주도로 이뤄졌고, 1996년 그가 정년퇴임한 이후부터는 새로이 취임한 황인한 사무총장에 의해 수행됐다.

황인한 사무총장은 대한노인회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통일원 교수로 재직했던 인사로 사리에 밝고 업무수행능력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 시기 중앙회는 회장보다 사무총장 주도 하에 운영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창현 회장은 노인사회를 대표해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고자하는 욕구가 대단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일이다. 노동단체, 여성단체, 농민단체, 장애인단체 등 모든 직능단체가 각자 자신의 분야를 대표해 집권여당에 비례대표를 신청했다.

백창현 회장은 노인사회에서도 전국 300만 노인을 대표해 집권여당에 직능대표를 신청할 경우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창현 회장과 필자의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백창현 회장은 자신이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필자는 전국 시도연합회로부터 후보추천을 받은 뒤 이사회 또는 비례대표후보추천심사위원회 등 공식의결기구의 심의를 거쳐 선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인사회를 대표하는 비례대표가 될 자격으로는 가급적이면 노인문제 전문가로서 국회에서 노인복지정책 개발에 기여할 능력 있는 인물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의견도 첨언했다. 그러나 백창현 회장은 회장단 회의나 이사회에서 논의하지도 않고 자신을 집권여당에 비례대표 신청서를 접수시키는 무리수를 뒀다.

그 결과 여성단체, 노동단체, 장애인단체에서 추천한 사람은 모두 여당의 비례대표 명단에 포함됐는데 노인회가 추천한 후보만 제외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만일 필자가 주장한대로 공식적인 의결기구를 통해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을 추천했다면 성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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