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명예 이사장
박재간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명예 이사장
  • 장한형
  • 승인 2006.09.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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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권익 복지향상 위한 헌신 외길 40년

효 이외에 어르신들에 대한 복지서비스를 규정한 그 어떤 개념도 찾아볼 수 없었던 60년대 후반부터 노인복지사회를 이끌어 온 선각자가 있다. 우리나라 노인사회의 산증인이자 수많은 노인학 학자를 배출한 산파역을 담당했고, 대한노인회 창설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박재간(82)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명예 이사장이다. 박 이사장은 사재를 털어 외국의 선진제도를 견학한 뒤 우리 실정에 맞는 제도를 고안했고, 정책입안자와 국회의원 심지어 대통령까지 설득해 오늘날 노인복지의 초석을 다진 위인(偉人)이다.

 

사비 털어 한국노인문제연구소 세우고 후학 양성

박재간 이사장은 한국 노인사회 및 복지제도의 산실이자 역사 그 자체다. 40대 중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오로지 노인권익과 복지 향상을 위해 헌신하며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경로우대증, 어르신들의 복지를 명문화한 노인복지법, 정체성을 잃어가는 경로효친 사상에 경종을 울린 경로헌장, 그리고 사회의 어른으로서 행동지침을 담고 있는 노인강령, 어르신들의 일자리 마련을 촉구하는 고령자고용촉진법, 노인 정책을 연구하고 비판하는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박 이사장이 외로운 사투 끝에 일궈 놓은 노인 관련 제도와 정책만 살펴봐도 이 어르신의 반평생 인생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1968년이었지, 당시 한국반공연맹 박관수 이사장을 모시고 있을 때였는데 서울, 인천, 부산, 대전, 전북에서 어르신들이 박관수 이사장을 몇 차례 찾아와 전국 노인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거야. 박관수 이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시절 은사였기 때문에 청와대쪽과 친분이 있어서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거든. 그런데 이 어르신이 날더러 노인단체를 맡아 보라는 거야.”


1969년 4월 15일 대한노인회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박 이사장은 대한노인회 상임총재로 추대된 박관수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 겸 총장의 보좌관으로 대한노인회 조직구성에 관여하게 됐다. 당시 공산권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박 이사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1973년 박관수 어르신이 정식으로 대한노인회 초대 회장에 취임했어. 그 때 내가 대한노인회 초대 사무총장이 된 거야. 그때부터 아주 바빠졌어. 공산권문제연구소 일하랴, 대한노인회 일하랴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지.”


박 이사장은 우선 조직구성에 뛰어들었다. 전국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을 설득, 대한노인회 조직에 편입시켰다.


“그 어르신들이 그냥 모이라면 모이나. 곰탕에 소주도 대접하고 타올이라도 챙겨드려야 모이지. 많을 때는 곰탕 600그릇, 소주 10상자, 타올 700개를 대접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하여튼 곰탕에 소주, 타올은 기본이었지(웃음).”


비용은 모두 박 이사장의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 승용차에 비서까지 주어지는 공산권문제연구소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산권문제연구소는 중앙정보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최고의 일자리였다. 그러나 박 이사장의 마음은 서서히 대한노인회 쪽으로 옮겨갔다.

“뭘 알아야 노인회 일을 하지. 그래서 무작정 선진국은 어떻게 하고 있나 보러 갔던 거야. 미국, 캐나다, 일본, 대만을 포함해 모두 10개 나라를 돌아봤어. 참 대단한 열정이었지.”


박 이사장은 외국을 돌아보는 3개월 동안 각 나라의 노인복지정책과 법률, 그리고 각종 노인 관련 도서와 자료를 현지에서 수집했다. 이 자료들이 오늘날 우리나라 노인복지정책의 근간이 될 줄은 박 이사장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다.


“영국 런던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에 들어갔을 때였지. 70여종이나 되는 노인 관련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거야. 충격이었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어른들을 모시지, 유럽 사람들은 경로사상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사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책 내용을 보고 더 충격을 받았어. 노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책, 음식에 관한 책, 간병 기술, 소득보장 등 일목요연하고 체계적인 연구로 기술된 책들이 가득한 거야. 우리나라보다 몇 곱절은 노인을 위하는 사회라는 생각을 갖게 됐지.”


박 이사장은 귀국에 필요한 여비만 빼고 갖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60여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광화문에서 동대문 사이에 즐비했던 서점을 모조리 뒤져 노인 관련 국내도서를 뒤졌다. 그러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서점주인들이 노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책이라며 추천한 ‘명심보감’이 유일했다.


“여생을 노인복지 연구에 투자하자고 다짐했지. 1973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노인문제연구소를 세웠어. 1975년에는 공산권문제연구소에 사직서를 냈고, 본격적으로 노인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지.”


박 이사장의 업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노인복지법 제정을 이끌어낸 일이다. 그는 1976년 4월부터 10월까지 선진국의 노인복지법을 참고해 전문 34조항에 달하는 초안을 작성, 복지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끝난 뒤 소득이 늘면 추진하겠다”는 답변만 들었다. 박 이사장은 1977년부터 3년 동안 대통령, 국회의장을 방문해 취지를 설명했다. 1980년 12월 28일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로비활동을 위해 국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에 앞선 1972년에는 경로헌장 마련에 앞장섰다. 초안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되고, 대통령 서명까지 받기 위해서는 우선 차관회의를 거쳐야 했다. 각 부처 차관을 일일이 방문해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이사장의 끈질긴 노력 끝에 같은 해 5월 8일 대한민국 최초의 경로헌장이 마련됐다. 경로헌장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어르신의 사회적 역할을 명시한 노인강령도 만들었다.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소지하는 경로우대증. 그 안에는 박 이사장이 이제야 말할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1981년 12월이었지. 윤보선, 한경직, 정주영, 안오상, 이병철, 이규동씨 등 당시 내로라는 거물 20명의 명단을 작성해 ‘국가원로를 초청해 노인문제에 대해 논의하자’고 청와대에 제안했지. 그래서 그달 28일 서울 필동 코리아하우스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났지. 대통령께 선진국에서는 실버카드를 만들어 교통비를 면제해 주고 있다, 핵가족화로 노인들이 경제력을 잃어가니 우리도 선진국처럼 노인교통비를 면제해 주자고 제안했지. 그런데 사실은 선진국에도 그런 예는 없었거든.”


박 이사장은 국가원수에게 거짓정보를 고하는 불경죄와 위험까지 감수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한번 해보자”는 답변을 보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건교부 장관 주관으로 전국 487개 버스회사 사장들이 모인 회의가 마련됐고,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경로우대제도의 시작이었다.


“1998년 대선 때는 당시 김대중 후보를 설득해 경로연금제 공약을 받아냈지. 그런데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IMF사태가 터진 거야. 애석한 일이었지.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약속을 지켰어. 그래서 73만명의 어르신들이 그나마 3만5000원~5만원의 경로연금을 받게 된 거야.”

 

경로우대증 등 노인복지정책 기본 마련한 선각자


박 이사장의 관심은 학계로도 번졌다. 1978년 국제노년학회에 참관했다가 우리나라 학자들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노년학회를 창설했다. 당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하상락, 고용복 교수와 중앙대 사회학과 김용복 교수를 설득, 1978년 12월 5일 한국노년학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현재 한국노년학회는 교수와 석사 이상 회원만 1200여명에 달하고, 1년 예산이 4억5000만원에 달하는 대규모 학회로 발전했다.


“노년학 2, 3세대 학자들은 마땅한 연구 자료가 없다보니 한국노인문제연구소를 도서관처럼 이용했지. 한 70~80명이 연구소에서 자료를 뒤져 박사학위를 땄어. 그들과 밤새 토론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스승의 날이면 선물꾸러미 들고 찾아오는 교수들이 아직도 여럿 돼.”


한국 노인복지의 선구자, 산파라는 별칭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박 이사장. 최근 정부 정책을 접하면 심기가 불편하다.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갑자기 노인수발보험법 등 보건의료 분야에 10조원을 쏟아 붓겠다는 정책에 일침을 놓았다.


“우선 경로연금을 통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줘야 돼. 잘 먹고 살아야 아프기도 하고 병원에도 가지. 의료보장은 그 다음이야. 지금 정책들은 주춧돌도, 기둥도 없어. 학자며 고위정책자들이 죄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스스로 해결하라’는 자본주의형 복지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어. 소득보장 없는 정책은 언제 무너질지 몰라.”


박 이사장은 현재 대외활동을 접고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1960년대말~90년대 노인복지정책 입안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니 후세에 그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박재간 명예 이사장은…

 

▷1924년 평남 성천 출생
▷동경 다이세이중, 스가모고교 졸업
▷1943~45년 동경 와세다대 경제학부 3년 재학 중 귀국
▷1945~48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졸업(3, 4학년)
▷1969~현재 대한노인회 초대 사무총장, 정책담당 부회장, 고문
▷1973~2005년 06월 한국노인문제연구소 이사장
▷1978~2005년 한국노년학회 창설, 부회장 및 회장(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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