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청진땅 밟아보고 싶어”
“고향 청진땅 밟아보고 싶어”
  • 연합
  • 승인 2010.06.25 11:12
  • 호수 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에 남은 마지막 반공포로 현동화(78)옹
“통일은 우리가 풀어야 할 지상 최대의 과제입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돼 죽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6·25전쟁 직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행을 선택한 반공포로로 인도에 정착해서 한 많은 반세기를 살아온 현동화(78)옹은 한국전쟁 60주년을 앞두고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간절한 소망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193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현 옹은 인민군 중위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강원도 화천전투에서 미군의 융단 폭격 와중에 부상했고, 요양 중 국군에 귀순했다.

반공포로로 서대문과 인천 형무소를 거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휴전협정 체결 직후 남과 북 어느 쪽을 택할지를 고민하다 결국 제3국행을 선택했다.

해방 후 북한에 살면서 남한을 동경했던 그는 고향 마을이 폭격을 당해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 때문에 북으로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가족들의 사망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신의 남한 잔류가 이들에게 엄청난 짐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반공포로 수용 의사를 밝힌 멕시코에 가면 미국으로 건너가 전쟁 중 다친 상처도 치료하고 학업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제3국행을 선택했다.

1954년 2월 동료 반공포로 88명과 함께 수송선 ‘아스토리아’ 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난 그는 마드라스(현재의 첸나이) 항을 통해 인도로 들어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참담한 심정으로 아스토리아 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래도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들어가면 다친 몸도 치료하고 학업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후 뉴델리에서 3년간 멕시코행을 기다렸지만 그를 받아주겠다는 회신은 오지 않았고, 그동안 동료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다른 중립국을 선택해 뿔뿔이 떠났다. 결국, 그는 멕시코행이 좌절된 6명의 동료와 함께 인도에 정착했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동료들과 황무지를 개간해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고, 한국에 가발산업이 번성할 때는 인도산 인모(人毛)를 수출하는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또 중동 건설붐이 한창일 때는 인도의 값싼 인력을 송출하는 사업에도 손을 댔고, 현재 알 카에다와 탈레반이 판을 치는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을 넘나들며 한국의 연불 플랜트 수출 1호인 ‘카불 섬유’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인도에 정착해 근면과 성실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한 셈이다.

1962년 인도에 한국총영사관이 생기면서 무국적자 신세를 면한 그는 영사관 직원으로 근무하며 북에 두고 왔던 가족들이 서울에 정착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감격에 겨워했던 그는 1969년 1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가 가족들과 상봉하고 맞선을 본 한국 여성과 결혼도 했다.

슬하에 둔 딸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잡았고,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인도로 들어와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이다.

반세기가 넘는 56년간의 인도 생활을 통해 그는 일과 가정 모두 훌륭하게 일궈냈지만,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지금 그에게는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

<연합>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