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상대 사기행각 위험수위
노년상대 사기행각 위험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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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17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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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별로 본 피해사례 실태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의 한 농촌마을 노인회장직을 맡고 있는 정낙선(71·가명) 씨는 지난해 9월 낯선 청년들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정씨에게 영화제작사 조감독 명함을 건넨 뒤 “영화에 출연할 엑스트라가 필요하다”며 “1인당 일당 2만8,000원을 줄 테니 최대한 많은 노인들을 모집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씨는 마을 노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일당을 준다는 말에 솔깃한 노인들은 청년들을 따라나섰다.

 

청년들은 대형버스에 이 일대 마을 노인들을 태워 횡성군의 한 방송사 촬영세트장으로 가 견학시켰다.

 

견학 뒤 노인들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제3의 장소에 내려졌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인삼, 홍삼으로 만들었다는 건강보조식품을 그럴듯하게 선전하고 개당 20만~30만원에 판매했다.

 

그러나 노인들이 구입한 제품은 효능을 알 수 없는 시가 2만~3만원의 저가품이었다. 당시 버스에 오른 노인은 모두 280여명에 달했다.


이처럼 판단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의 약점을 악용,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물건을 판매하거나 강매하는 악덕 사기행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정보제공이나 예방교육이 전무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본지 취재 결과 사기수법이 갈수록 지능화되는 데다 사기판매업자들이 관련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어 제도적인 안전장치 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인들의 피해실태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지난해 10월 집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4년 60세 이상 노인들이 청구한 4,995건의 상담 가운데 악덕상술과 관련된 경우는 276건(5.5%)이었다.


노인들을 속인 수법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물품설명과 함께 게임·노래 등 여흥을 제공하거나 팔·다리 등을 안마해 환심을 산 뒤 물품을 판매하는 이른바 ‘최면상술’이 악덕상술의 절반 이상인 157건을 차지했다.


또 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창립이나 신제품 개발을 기념해 제품을 공짜로 나눠 준다고 속여 인적사항을 확인, 물품을 보낸 뒤 마치 정상적으로 계약 구매한 것처럼 위장해 강매하는 상술이 59건으로 뒤를 이었다.


이밖에 건강관련 세미나를 여는 것처럼 위장해 노인들을 끌어 모은 뒤 물품을 시연, 판매하거나 온천·유명관광지를 무료 또는 싼값에 구경시켜준다며 현혹해 제품을 판매하는 고전적인 수법도 빠지지 않았다.


경상북도 소비자보호센터가 지난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포항·상주·청송 등 도내 6개 시·군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주민 365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도 노인들을 울리는 악덕상술이 확인됐다.


설문조사 결과, 조사대상 노인의 37.7%가 “최근 1년 이내에 악덕상술에 의해 물품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고, 이 가운데 77.9%는 구입한 물품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악덕상술에 속아 물품을 구입한 노인의 62.7%는 “단순히 오락거리를 제공하거나 아무 조건 없이 공짜로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물품을 구입한 동기는 판매원의 허위·과장 설명 때문이었다는 응답이 전체의 29.9%로 가장 많았고, 사은품을 받거나 무료관광 등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구입했다는 응답이 20.9%로 뒤를 이었다.


특히 판매원의 강압적인 권유로 물품을 구입했다는 응답도 11.9%나 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악덕상술에 속아 물품을 구입한 노인의 70.1%가 품명이나 판매자 연락처 등이 명시된 계약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 피해구제가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물품 구입자의 87.7%는 그대로 값을 치렀고, 반품이나 계약해지를 요구한 경우는 12.3%에 불과했다. 


춘천 강원소비자연맹에 접수된 고발 사례는 농촌지역 거주 노인에 대한 피해가 더욱 심각한 데다 수법도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원소비자연맹 조송자 사무국장은 “농촌지역 및 노인인구 비율이 높은 강원도의 경우 악덕상술에 의한 피해사례가 해마다 두 배 이상 늘어나는 추세”라며 “단돈 1만 원에 단풍구경을 시켜준다며 노인들을 꾀어 시가 2만~3만원 상당의 저가 제품을 10배 이상 비싼 20만~30만 원에 판매하는 경우는 애교로 여길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경품행사에 당첨됐다며 택배비만 내라고 속인 뒤 저가 제품을 보내고 택배비와 함께 물건 값을 챙기는 등 신종 수법도 적발됐다”고 말했다.

 

이어 “겨울철에는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는 농촌지역 노인들을 상대로 화투를 쳐주거나 윷놀이를 하면서 푼돈을 뜯어가는 파렴치범들도 고발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악덕상인들은 노인들이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이용, 가장 보편적인 피해물품인 건강보조식품을 비롯해 방석, 베개, 메트리스, 목걸이, 팔찌 등 일반적인 건강용품과 함께 찜찔기, 부항기, 안마봉, 혈침봉, 가정용 저주파치료기·온열치료기 등 비교적 고가의 의료보조기구들을 단골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일선 소비자단체의 피해사례를 분석한 결과 2003년 이전에는 100만 원대 안팎의 고가제품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20만~30만 원대 이하의 상품을 통해 박리다매(薄利多賣)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건강관련 제품뿐만 아니라 최신형 TV, 김치냉장고, 휴대폰 등 경제력을 가진 일부 노인들을 겨냥한 고가 가전제품으로 피해물품이 확대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피해 예방 및 대책은 없나


악덕상술에 속아 물품을 구입했다면 소비자고발센터 등 관련기관에 고발하고, 도움을 받아 피해를 구제받는 것이 현명하다.


대한주부클럽 소비자고발센터 이영숙 간사는 “악덕상술에 의해 구입한 물품이라도 방문판매법이나 할부거래법에 의해 반품이나 환불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위해 판매업자의 연락처나 주소를 반드시 확인하고 계약서를 정확히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문판매법의 경우 제품을 훼손하지 않았을 경우 구입한 날로부터 14일 이내에 반품할 수 있고, 판매업자의 주소나 연락처가 잘못됐을 때는 이를 바로 안 날로부터 14일 이내에 반품한다는 내용증명을 보내면 된다.

 

또 할부거래법은 2개월 이상 또는 3회 이상 할부 약정해 구입한 10만원 이상 물품에 대해 반품하도록 되어 있다.


악덕상술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인들 스스로 경각심을 갖는 한편 관계기관이 나서 적극적인 예방교육을 펼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인들을 노리는 악덕상인들이 관련 법망을 교묘히 피해 단속 및 처벌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연맹 정책연구실 송순영 책임연구원은 “현 법체계상 노인만을 위한 피해구제법 제정은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조건과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노인들 스스로 경각심을 갖는 한편 관계기관이 나서 적극적인 예방교육을 펼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강원소비자연맹 조송자 사무국장은 “‘노년시대’와 같은 노인전문 매체의 필요성이 매우 시급한 상황이었다”며 “노인들에게 피해사례 등 관련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노인들이 건전한 여가를 보내고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마련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주 주부클럽 소비자고발센터 관계자는 “전주지역의 경우 노인들을 상대로 한 악덕상술 피해사례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며 “이는 노인들이 시내 주민자치센터와 노인복지회관 등을 통해 건전하고 알찬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어 악덕상술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공연관람 등에 속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주시의 경우 시청 지원 아래 이미 10년 전부터 취미 중심의 ‘실버동호회’가 활발히 운영 중이며 동사무소를 활용한 30개소의 주민자치센터에서 모두 1,500여명의 노인들이 민요, 사교댄스, 한국무용, 사물놀이 등을 즐기고 있다.


또 시내에 자리한 3개소의 노인복지회관에는 하루 2,5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 당구, 수지침, 발마사지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활기찬 노년시대를 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거리가 필요한 노인들은 하루 최대 350명까지 시가 운영하는 7개소의 ‘노인 일거리 작업장’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볼펜조립, 봉투제작, 마늘까기 등의 작업을 통해 심신을 달래고 용돈도 마련하고 있다.


전주시청 사회복지과 노인복지팀 송오영 씨는 “노인들이 활발한 문화생활을 통해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악덕상인들이 발들일 틈이 없다”며 “노인들이 일하며 즐기고 쉴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악덕상술 피해 상담 및 고발
한국소비자보호원 02)3460-3000
대한주부클럽 소비자고발센터 02)779-1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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