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문학 전통계승 보람·긍지 대단해요”
“구전문학 전통계승 보람·긍지 대단해요”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1.04.27 11:12
  • 호수 2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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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고영희(64)씨

“옛날 어느 마을에 한 할머니가 수탉과 함께 살고 있었어요. 홀로 외로이 살고 있던 할머니는 수탉을 아주 소중하게 키웠고, 수탉도 할머니를 아주 좋아했답니다.”

4월 20일 서울 강서구의 한 유치원.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고 있는 고영희(64)씨가 ‘할머니와 수탉’이란 전래동화를 들려주자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행여나 이야기를 놓칠까 할머니 곁에 바짝 붙어 앉는다. 고씨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때론 방정맞은 수탉의 울음소리로, 때론 욕심쟁이 부자아저씨의 심술궂은 목소리로 변한다. 아이들은 눈 깜박일 사이도 없이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고씨가 “모이주머니야, 모이주머니야, 모두 내뿜어라”라고 외치자 아이들도 목청을 높여 “모두 내뿜어라”를 힘껏 외친다. 그렇게 함께 웃고, 소리치고, 노래하며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앞 다퉈 고씨 주변에 몰려든다. “이야기 더해 주세요” “할머니, 매일 오면 안돼요?” “저도 수탉 키울래요” 아이들은 서로 말을 붙이겠다고 야단이다. 무릎에 앉고, 뒤에서 목을 끌어안는다. 할머니 가슴에 안기고, 볼을 비비며 입맞추는 아이들도 있었다. 마치 친할머니를 대하듯 다정하고 친근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고씨는 2기 교육생이다. 지난해 8월부터 ‘유아인성교육’ ‘이야기 구연방법’ ‘생활예절’ 등의 소양과 전문교육을 받고, 올 3월부터 서울지역 유치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지역의 2개 유치원과 강화도의 유치원 한 곳에서 아이들을 만난다. 고씨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손자손녀’만 150여명에 이른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과거 우체국 공무원, 호스피스로도 일했지만 지금처럼 기쁘게 일하진 못했지요. 예순을 넘겨 비로소 내게 딱 맞는 일을 찾았습니다. 강화에서 서울까지 왕복 4시간을 이동하지만 아이들이 내게 주는 기쁨과 감동은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선택하라면 이야기 할머니 사업에 참여한 것을 으뜸으로 꼽을 것입니다.”

고씨가 참여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통을 살리고, 1·3세대 간 공감을 넓히기 위해 올해로 3년째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선발된 할머니들은 6개월 동안 동화작가, 평생교육원장, 독서교육연구회 고문 등이 진행하는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다. 활동 및 인성지도를 위해 정기적으로 보충교육도 받는다.

고씨는 “동화책과 TV가 없던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유일한 여가놀이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옛 풍속이 사라지고 있습니다”며 “사라져가는 구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보람과 긍지를 갖고 즐겁게 봉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게 된 건 지난 2006년 한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동화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학창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모집공고를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지며 ‘딱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서류접수까지 마쳤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과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15분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15분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성품과 생각이 변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단순히 동화를 외우는 것으로 끝낼 수 없었다. 목소리를 녹음하면서 연기연습도 했고, 가족들 앞에서 수 십번씩 예행연습도 했다. 5년여의 연습 끝에 이젠 이야기 속에 가족애와 우정, 권선징악, 효 등 많은 교훈도 함께 담아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이야기 할머니’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고씨. 64세인 그는 "아직 젊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감수성을 살찌우고, 바른 인성을 키우는 일에 남은 평생을 보내겠다는 굳은 의지도 밝혔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와 우리 것을 이해하는 매개체로 이야기 동화만한 게 없습니다. 이야기 할머니들은 구전문학 전도사이자 전통문화지킴인 것이지요.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구전동화가 단절되지 않고 생명력을 갖을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전파하는 것에 나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안종호 기자 joy@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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