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③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③
  • 관리자
  • 승인 2006.11.0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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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창곡 ‘애모’ 부르고 웃음 안겨주는 친화력의 성자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성당 건물 구역에서 신부복을 입은 사제를 만나게 되면 대개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느낀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움찔 놀랄 정도로 마음이 경건한 그때 신부가 위트 있는 말 한마디를 건넨다면 어떨까.


그런 감동을 안겨주는 이가 김수환 추기경이다. 김천 본당(지금의 황금동 본당)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에도 그런 일면이 있다. 김천 본당 사목으로 자연스럽게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신부가 됐는데, 이때 요즘 말로 ‘인기짱’으로 여학생들이 아빠처럼 따랐다고 한다.

 

  동두천 성당 봉헌 및 축하식에서 꽹과리를 치고 있다(1992).

 

평화신문에서 펴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날인가 마당에서 여학생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데 수녀님이 ‘학생들과 장난치면서 노는 교장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며 슬쩍 눈을 흘긴 기억이 난다”며, “그때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나를 무척 따르고 정이 깊게 들었다”고 했다.


제1회 졸업식 날 40여 명이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않고 내내 울기만 하다 결국 사제관에서 자고간 적도 있단다. ‘수녀님’은 눈을 흘겼지만, 그런 김 추기경에게 학생들과 신자들은 큰 감화를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그 시절의 제자들 중에 그후 몇이 수녀가 되는데, 교구장을 대신하여 면담하러 간 자리에서 수도복을 입고 있는 그때의 제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의 김수환 추기경의 이미지에도 친근한 모습이 있다. 사회자나 기자에게 유머러스하게 답하여 엄숙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모습이다. 사제로서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장난기와 유머가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


“제가 그런 것 같기는 해도 저 스스로는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못해요.”


겸양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김 추기경은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다. 좀 더 사람들을 웃고 평안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이런 친화력의 리더십으로 추기경 서임 당시 70만이던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 수를 500만 명을 훌쩍 뛰어넘게 선교했는지도 모르겠다.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굴곡이 심한 한국근대사의 고비고비마다 김 추기경이 남긴 자취가 그래서 더욱 뚜렷하다.

 

‘노래하는 추기경’으로 알려진 뒤 100번도 더 불러

인간으로 내려온 추기경의 친화력을 좀 더 살펴보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김 추기경은 상석인 중앙(체어맨의 자리)에 있다가 귀가 약간 안 들린다며 필자 곁으로 내려와 나란히 앉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상복을 입고 편히 맞아준 데서 한 걸음 더 나간 배려였다.


신자나 보통 사람을 박장대소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유머러스하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이 욕심이라는 증거가 있다.

  KBS 열린음악회에서 '애모'를 부르고 있다(1995).

 

“내가 여러 가지 말을 좀 합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해서 일본 말을 좀 하고, 독일에 가서 공부했으니 독일 말도 좀 하고, 영어는 조금은 할 줄 알고, 우리나라 말도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외국어 실력도 줄고 어휘력도 달린다’는 이야기 끝이라 진지한 순간이었는데, “그 외에도 두 가지를 더해요. 그게 뭐냐면 하나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참말입니다”라는 것이었다.


테니스를 처음 시작하던 이야기도 재미있다. 명동의 추기경 집무실 아래로 테니스코트가 내려다보이는데, 늘 창밖으로 내다보다 한번은 내려가서 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때 김 추기경은 50대 후반이었다.

 

“성모병원의 아는 의사와 신부님이 복식 게임을 해야 하는데, 마침 한 사람이 모자랐습니다. ‘추기경님은 라켓을 들고 여기 서 계시기만 하세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서 있었더니 공이 저절로 내 라켓에 와서 맞아 주더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테니스는 김 추기경이 일생 즐긴 스포츠 중 유일한 종목이었으나 그로부터 10년 후 상계동 철거민들이 명동성당 테니스코트 옆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게 되면서 그만두었다. 고생하는 철거민들에게 아무래도 호사스럽게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일어 독어 외 ‘참말’‘거짓말’등 7개 국어도 해 ‘웃음’

가톨릭 신자는 물론이고 텔레비전 시청자들까지 즐거워한 일도 있다. KBS 열린음악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출연하여 가수 김수희의 ‘애모’ 노래를 불렀던 것. 사회자의 요청에 즉석에서 ‘애모’를 구성지게( ) 노래하여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애모’뿐만 아니라 그 무렵에는 ‘만남’ ‘사랑으로’를 비롯해 김도향이 부른 ‘향수’같은 노래도 가끔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김 추기경이 부른 ‘애모’의 노랫말이 예사롭지 않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너머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사제로 일생을 살아온 김 추기경에게 말 못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가 있지나 않은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할만큼 애절하다. 물론 하느님을 향한 노래일 것이지만. ‘노래하는 추기경’으로 알려진 뒤로 가는 데마다 ‘애모’를 불러 달라 하여 100번도 더 불렀을 거라고 김 추기경은 기분 좋게 회고했다.

 

혼자 있을 때도 노래를 부를까  85세인 지금도 노래를 부르는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혼자서도 부릅니다. 은퇴하고 난 뒤에는, 특별히 최근에는 목소리도 잘 안 나오고 가사도 잊어버리고 해도 혼자 흥얼거리며 불러 봐요. 얼마 전 추석 때 신부님들과 함께 어디 같이 간 일이 있는데 차안에서 신부님들이 노래를 불러서 나도 따라 불러보고 그랬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원래 음주가무를 좋아했다고 하니 김 추기경도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하지만 추기경으로서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충만한 신앙심에 바탕한 커다란 친화력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전방부대서 군인들이 주는 술 마시다 취한적도…


친화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면 몇 가지를 보자. 사진첩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진이 있어 음악을 연주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김 추기경은 연출사진이라고 했다.

 

연주를 했던 것은 형님(김동한 신부)이 있던 어느 시골 성당에서 오르간으로 반주를 해본 것이 여러 사람 앞에서 연주를 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멜로디도 겨우 읽을 동 말 동 하는 편인데 쳤어요. 시골 사람들이라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니…”


 김 추기경의 서예작품은 더러 있다. 가까운 신자들 중에 가끔 지필묵을 가져와 써달라는 경우가 있어 ‘할 수 없이’ 써주었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은 ‘졸필’이라며 겸양을 했지만, 신자들은 그렇게 받은 김 추기경의 글씨를 액자로 걸어두고 감상한다고 한다.

 

  군종센터 축복식에서 휘로를 쓰는 김 추기경(1996).


또 다른 인간적인 면도 있다. 젊은 시절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김수환 추기경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 얘기가 있다. 추기경 서임 직후 ‘신동아’에 난 기사(박권상)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술은 별로 많이 안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술이 있다면서 고급주 ‘쾅트로’한 병을 내왔다는 것.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잔으로 그치지 않고 향기를 좀 더 오래 맡으며 대담을 했다고 기자는 쓰고 있다.


만취하여 고생한 경험도 있다. 김 추기경은 “옛날에는 전방부대 방문을 간다든지 하면 목숨 걸고 고생하는 군인들이 안쓰러워 주는 술을 받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어요. 그래서 받아 마시다 나중에는 한도가 넘어버린 적이 있어요. 취해서 다음날까지 후유증을 겪기도 했지요”라며, “그러고는 술 마실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취한 적이 없어요. 포도주는 한 잔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귀에 염증이 있어서 포도주도 못 해 불편해요”라고 했다.


박권상 당시 기자는 “추기경이자 대주교를 대한 것 같지 않는 느낌이었다”며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담백하며 겸손하고 친절하고 너그러우며 솔직하고 한없이 착하고 어진, 평범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며 김 추기경의 친화력과 성(聖)스러움을 동시에 묘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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