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④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④
  • 관리자
  • 승인 2006.11.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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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 엔돌핀에 도움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을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종교나 정파적인 입장이 독자마다 다르고 호불호도 있을 수 있지만 본 시리즈에 소개하는 우리 사회의 덕망이 있는 지도자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인적 자산입니다.

 

지도자들의 세상에 대한 마음가짐, 섭생, 일상의 행복 등을 살펴봄으로써 노년세대와 노후를 준비하는 세대 모두에게 건강과 장수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시리즈 첫 번째로 천주교의 최고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 편을 연속 게재합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지만 노년세대를 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의 ‘건강 노년·문화 노년’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병로 국장〉
 ※사진제공:한국교회사 연구소


  금호동 평화의 집 방문(1990).

 

수환 추기경은 아직 젊은 사람들처럼 책을 가까이 한다. 집무실에 신자들이나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저자들이 보내온 책들이 수북하다. 읽어보고 소개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며 한보따리씩 가져다 놓은 책도 있다.


집무실 테이블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보이는 책장에서 ‘유림’이라는 책이 있다. 작가 최인호가 유교의 가르침을 소설 형식으로 쓴 그 책을 왜 그렇게 좋은 위치에 꼽아놓았을까. 물론 김 추기경은 “보내오는 책을 다 읽지는 못해요”라고 한다. 그러니 비가톨릭적 신앙관과 관련된 책이 읽어보지 않은 채, 눈이 가기 좋은 곳에 꼽혀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연이건 의도적이었건 그 책이 거기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가톨릭 최고 지도자의 ‘성스런’ 집무실에 그것이 왜 놓여 있을까. 율법에 경직되게 얽매이지 않는 이런 자유로움과 열린 정신이 있어 80대 중반을 넘어가는 오늘까지 김 추기경이 건강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건강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국을 아시아권 제일의 가톨릭국가로 올려놓는 밑거름이 되었을 수도 있다. 교회사연구가들이 밝혀낼 일이지만, 전통적 가치관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적절히 수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선교를 해간 성과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인구대비 아시아 제일의 신자 수, 총 신자 수, 두 명의 추기경, 103인의 성인 등 가톨릭 교회에서 자랑하기 좋은 1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권력에 자신의 방식대로 의사표시 빛과 소금 역할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이야기”에 “나는 개띠인데 저녁에 태어났다. 그 시각은 개가 죽을 얻어먹는 때라서 그런지 먹을 복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염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입에 담는 십이지지의 띠 이야기와, 거기 결부된 ‘복’ 운운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 가톨릭적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 때문에 김 추기경이 더욱 존경받는다. 또 그래서 김 추기경 자신은 행복한 엔도르핀이 솟아나고 심신이 더욱 건강해지는 선순환(善循環) 효과를 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과 보통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따뜻한 시선과 살가운 마음가짐의 일면이다.

  행당동 철거민과 함께(1997).

 

낮은 곳, 어두운 곳을 향하는 김 추기경의 시선을 좀 더 살펴보자. 전호에서 보았듯이 언론인 박권상씨의 1969년 신동아 인터뷰기사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신자들과 함께 화투놀이도 한 적이 있다. 추기경이라는 높은 성직자가 그런 세속적인 놀이를 했을 것 같지 않아서 던져본 질문이었다.

 

당시 김 추기경은 “글쎄요. 교인들이 서로 만나면 취미로 그런 것을 더러 하는 모양인데, 아직까지 그런 것을 할 여가가 없었어요. 마산에 있을 때인데 지방 교회를 갔더니 신자들이 나이롱뽕을 하자고 해요.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배워서 그날 꼭 한 번 해본 일이 있어요. 그저 이름만 대개 알지요.”라고 했다.

 

사제에게 ‘나이롱뽕’을 하자고 한 신자들이나, 함께 한 추기경이나 우리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들답다. 이런 정서적 바탕이 있기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사회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 추기경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지난 40여년이 오늘날 의미 있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그는 사제 서품 뒤 평생을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의사표시를 하거나 저항을 하며 종교지도자로서 빛과 소금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심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파급효과를 불러오기 시작한 것은 40여년 전,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재임하던 때. 김 추기경의 회고록에 따르면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도 심심찮게 다뤘다. 어느 날 신문사에 드나드는 정보과 형사가 ‘가톨릭 시보에 이런 사회적 얘기도 쓰네요’하며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그 후, 김 추기경은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들, 철거민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노동자와 농민 등 약자 편을 들다가 오해도 많이 받았다. 심지어 가톨릭은 좌익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경찰에 쫓긴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성당으로 왔을 때도 김 추기경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때 입장을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교회가 기업주와 경찰의 폭력과 허위 조작에 쫓겨 울면서 찾아온 여공들을 내친다면 사제나 레위 사람의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은 노동문제 개입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이웃 사랑이다.”

 

지방교회 방문 때 신자들과 ‘나이롱뽕’ 꼭 한번 해봐

이런 관점에서 볼만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 김 추기경이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하는 장면이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봤지만, 가장 대화다운 대화를 그때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최고권력자와 최고종교지도자간에 종교논쟁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종교란 마음의 정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가 정치·경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고유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고, 정교분리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김 추기경은 그런 얘기를 할만하다면서 사람들이 종교나 교회에 가장 바라는 것이 ‘빛과 소금’역할이고, 나아가 사회 전체의 어둠도 밝혀줌으로써 사회를 도덕과 윤리로 정화시켜 주길 원하고 있다고 했다. 교회가 그것을 방관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라고도 했다.

 

  진해성당 방문(1969).

47세, 서임 당시 최연소로 추기경의 지위에 오른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동양적으로 말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기 싸움에서 김 추기경이 전혀 밀리지 않았다.


추기경에 서임된 직후, 언론인 박권상 씨가 ‘천주교인이 수는 적어도 질적으로 강하고, 공산당 조직보다 세다고 흔히 말하는데, 추기경의 생각은 어떤지’ 묻는다. 이에 김 추기경은 “천주교의 조직이론을 공산당이 이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하고 공산당하고 다른 것은 조직이 사상을 토대로 하고, 반면에 우린 개개인의 각성, 본인의 자각을 토대로 하고 있고…. 그러니까 전연 다르지요”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197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 정권은 물론이고 1980년대의 전두환, 노태우 정권,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중심에 김 추기경이 있었다. 정치 경제 등 사회 모든 문제에서 인간 기본권이 유린당하거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아니오’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의 거처가 있던 명동성당은 한국 현대사, 특히 민주화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찾아와 안식을 얻고, 쫓기는 민주주의 운동가들이 피난하기도 했다.

 

“아직도 자명종 울리면 하루 2시간 이상 기도해요”


이런 따뜻한 마음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장본인으로 김 추기경이 지목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천주교 ‘정구사(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사회변혁에 적극 나서는 것을 보고 김 추기경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 아니냐는 모함을 받은 것. 김 추기경은 “억울한 심정을 털어놓을 데는 하느님밖에 없었다. 당시 십자가 앞에 서면 허구한 날 ‘하느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회고록에 밝히고 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해서 김 추기경은 사회 정의를 위해 이바지한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기초한다’고 슬쩍 넘어간다.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그렇다 해도 최고 어른인 추기경의 뜻이 아니고서는 한국 가토릭의 사회참여는 있을 수 없다.

 

여러 자리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김 추기경 스스로는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는 관심이 없었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기켜주려고 했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렇게 온몸을 던진 덕분에 한국 민중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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