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00세 시대’ 입증하는
90~100세 ‘현역대표주자’
‘인생 100세 시대’ 입증하는
90~100세 ‘현역대표주자’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3.01.04 16:34
  • 호수 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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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97) 정식품 명예회장
영어공부·연구활동 삼매경… 97세 ‘열혈청춘 회장님’

1917년생인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고령 경영자다. 정식품을 창립, 국내 최초로 두유 ‘베지밀’을 개발·보급한 정 회장은 현재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제품연구 및 저작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의 나이 올해 97세. 하지만 정 회장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강한 열정의 소유자다. 분기마다 청주공장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제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신제품 아이디어를 전할 정도다. 또, 정 회장은 올해 초 자서전 출간을 준비 중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평생 연구해 온 콩의 효과를 비롯해 두유 개발과정, 소아과 의사에서 정식품 대표가 되기까지의 모든 인생스토리를 담을 예정이다.

과거 그는 전문 경영자가 아니라 평범한 소아과 의사였다. 모유와 우유에 들어있는 유당성분을 소화 못하는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연구를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실패를 반복하면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유당이 없으면서도 3대 영양소(단백질·탄수화물·지방)가 고루 함유된 콩을 이용해 대용식을 만들어낸 것. 그것이 바로 ‘베지밀’이다. 정 회장은 “내가 만든 두유 덕을 내가 제일 많이 봤다”며 “70대 중반까지 머리가 하얀 백발이었는데 두유 덕분에 검은 모발이 자랐다”고 털어놨다.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열혈청춘’ 정재원 회장. 그는 매일 3시간씩 영어공부를 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8시까지 EBS 라디오 영어강좌를 듣는다. 평생 배움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90세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 벌써 8년째다. ‘공부는 삶에 열정을 주는 활력소’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드니까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영어를 들어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더 집중하고 반복해서 듣는다. 요즘에는 쓰고 말하는 훈련도 하려 애쓴다.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사실 정 회장이 영어공부를 지속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콩과 영양에 관한 최신 영어 논문을 찾아 읽기 위해서다. 시력이 떨어져 글자를 확대하는 전자장비를 사용해 논문을 읽지만 문장을 하나라도 놓치는 법이 없다. 자료가 부족하면 직접 인터넷도 검색한다. 이렇게 연구·개발을 지속하고 있는 그는 2010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대두학회’에 참석해 연구결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1~2시간씩 산책을 할 만큼 정정하다. 아침 식사 후 30분 가량 가벼운 산책코스를 즐기고, 오후에는 자택 정원에서 나무와 꽃을 돌본다. 정원 및 온실 가꾸기는 그의 오랜 취미이자 건강비결이다.

식품회사 경영자의 건강식단에는 특별한 것이 있을까. 그는 ‘베지밀·식물성식단·소식’을 건강비결로 꼽았다. 더불어 하루 세끼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채소와 견과류를 곁들인 소박한 식사를 즐긴다는 것. 늘 배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열정이 있기에 정재원 명예회장은 늘 청춘이다.


김윤광(96) 성애·광명의료재단 이사장
평생 일군 병원 사회헌납… 100세 시대 웃어른의 표상

계사년(癸巳年) 96세가 된 김윤광 성애·광명의료재단 이사장은 국내 의료계의 최고령 경영인이다. 1968년 영등포구 신길동에 성애의원을 개원한 그는 42년이 지난 지금 10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성애병원, 광명성애병원)을 거느린 의료재단 이사장이 됐다. 특히 그는 평생 일군 성애·광명병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해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한 그는 사회복지재단인 윤혜복지재단을 설립해 극빈자들에게 의료비 지원 및 몽골 환자 진료비 지원 등의 선행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 사람의 의사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김 이사장. 그의 이웃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평안남도 순천이 고향인 그는 탈북자 진료에도 적극적이다. 그동안 성애병원에서 진료 받은 탈북자는 2500여명에 달한다. 실향민의 아픔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보훈환자도 정성껏 돕는다. 6·25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경험 때문이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성애병원이 보훈환자 지정병원으로 지정될 당시 25만명이 넘는 보훈환자를 진료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김 이사장은 지난 2010년 최고 훈격에 해당하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무궁화장까지 그가 수상한 훈장만 3개(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1년 수교훈장 흥인장)째다.

특히 김 이사장은 몽골명예영사로 위촉될 정도로 민간외교사절의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의료시설이 열악한 몽골에서 치료가 어려운 환자를 데려와 치료해 주고, 매년 2~3명의 젊은 의사·간호사를 초청해 선진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현재 성애병원에서는 내원하는 몽골인들에게 통역서비스 등 내국인에 준하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몽골 대사관과의 수가협의를 통해 많은 의료혜택을 받게끔 하고 있다.

김 이사장이 몽골에 주는 것은 의료지원만이 아니다. 그는 어린 몽골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연필과 공책을 보내고 있다. 그의 손을 거쳐 몽골로 건너 간 공책이 20만권, 연필도 20만 자루가 넘는다.

김윤광 이사장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지만 늘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찾아다닌다. 의사로서의 경력을 살려 지역 내 경로당이나 복지관을 찾아가 어르신들에게 건강관련 강의도 펼치고 있다.

김 이사장의 건강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경영일선에서 일할 수 있는 이유로 과거 배구선수로 생활하며 다져진 기본 체력을 언급했다. 더불어 평상시 술, 담배 등 몸에 해로운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또한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건강장수 비결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 이사장의 생활신조는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와 ‘사랑의 실천’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김윤광 이사장. 평생의 결실이 담긴 병원을 사회에 내놓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개인 소유의 3만평 대지에 양로원을 짓고 싶은 게 그의 마지막 소망이다.


정소파(100) 시조시인
경력 80년, 100세 현역작가…“늘 그랬듯 오늘도 시를 쓴다”

“100세가 됐다고 뭐 특별한 것이 있나. 오늘도 늘 하던 대로 펜 가는 대로 시를 써 내려갈 뿐이지.”

숨이 멎는 그 날까지 계속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100세 현역작가 정소파 시인. 우리나라 최고령 시조시인인 그는 요즘도 신작을 발표하는 엄연한 ‘현역’ 시인이다. 17세 때 등단했으니 활동 경력만도 80년이 넘는다.

정 시인은 “요즘도 새벽에 구상해서 작품이 떠오르면 아침식사 후 그걸 정리해 시조를 쓴다”며 “생각이 많을 때는 하루에 2∼3편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 시인은 요즘처럼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맹추위에도 매일 아침 원고지에 시를 써내려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작품을 쓰고 읽는 것이 수십년 반복되면서 이제는 그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그에게 시조 창작은 단순한 창작 활동이 아니다. 고요한 새벽녘, 시 한편을 짓는 것이 그에게는 성스러운 종교의식과도 같다.

“아침에는 침대에서 온몸 마사지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오후에는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산책을 해. ‘늘 생각하고 창작하는 것’이 나만의 장수비결인 셈이지. 시를 쓸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나이가 많아도 계속 시를 쓰기 때문에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웃음).”

정 시인은 10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열혈 문학청년’ 같았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뒷산을 산책삼아 오르내린다. 오후면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산책도 한다. 무엇보다 하루 원고지 30~40장을 시로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그는 “그만두려고 해도 자꾸 시심이 실타래 풀리듯이 나와 걱정”이라며 “이름 석 자를 기억시킬 수 있는 멋진 시 한편은 남겨두고 가야 할 텐데 아직 내공이 부족한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소파 시인은 평생 작가의 길 이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문재(文才)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시절, 광주지역 백일장을 모두 휩쓸다시피 했고, 전국 백일장 지역대표로도 활약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불과 열일곱 살 때, ‘개벽’에 시 ‘별건곤(別乾坤)’이 당선되면서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됐다. 당시 그가 지은 시 ‘별건곤’은 일제가 강제로 나라를 빼앗아 ‘딴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종의 ‘참여시’였다.
그는 계속 국내에 남아 시를 쓰고 싶었지만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강권으로 19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후 광주에 돌아온 뒤에는 ‘설창’ ‘호남공론’ 등 각종 잡지를 만들면서 ‘광주문단’에 주춧돌을 놓았다.

광복 후 정 시인은 전남 여수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틈틈이 시조를 썼다. 6·25전쟁 와중에도 고향 근처에 머물며 시조 창작에 몰두했다.

당시 시조의 명맥이 끊길 것을 우려해 지역 문인들과 ‘호남시조문학회’를 설립, 지금까지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100세 시인의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문학애와 열정은, 그 보다 30~40세 젊지만 무기력하기만 한 후세에 따끔한 회초리가 아닐까. 사진제공=윤석정 시인
안종호 기자 joy@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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