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손자녀와 함께
전통 연 만들어 보세요”
“설 명절, 손자녀와 함께
전통 연 만들어 보세요”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3.01.18 11:21
  • 호수 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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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리연, 가로·세로 30cm 마름모꼴 재단
방패연 뼈대, ‘머릿살’ 굵고 ‘허릿살’ 얇아야
계사(癸巳)년 새해, 구정 설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노인들이 설 연휴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멀리 떨어져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가족들이 모여도 아이들은 컴퓨터에, 어른들은 TV나 화투에 빠져 각자 시간을 보내기에 바쁘다. 올 설 명절에는 온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설 민속놀이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잊혀져 가는 세시풍속과 전통놀이를 함께 배우고 즐긴다면 잊지 못 할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안종호 기자 joy@100ssd.co.kr

 

▲ “설날 민속놀이, 온 가족이 함께 즐겨요” 대전 중구청이 2010년 마련한 ‘청소년 효문화체험 겨울캠프’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할아버지들과 함께 방패연을 만들고 있다.사진=연합

설날 아침 차례와 성묘를 지낸 다음, 친척과 마을사람들이 한 데 모여 각종 전통놀이를 즐겼다. 윷놀이와 널뛰기, 연날리기, 투호놀이, 팽이치기, 쥐불놀이 등이 대표적이다.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집에서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들을 소개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긴 ‘윷놀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민속놀이인 윷놀이는 농경사회에서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윷판은 농토, 윷말은 놀이꾼으로 윷을 던져 나온 윷패에 따라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상징해 풍년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다. 용어도 가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데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에 비유된다. 특히 말판 구성은 중앙(북극성)을 중심으로 29수의 별자리를 돌리는 천문학의 원리가 들어있다. 오묘한 한민족의 비기를 게임에 숨겨서 전해준 것이다.

왕족 등 지배층 여성들의 오락 ‘투호놀이’
투호는 일정한 거리에 통이나 병을 놓고 이 병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로 예전 중국 한나라 시대 이전부터 시작 됐다고 추정하고 있다. 주인과 손님이 마음을 다스리면서 대화를 나누며 진행했던 민속놀이로 주로 왕실이나 귀족층의 놀이였다. 마당 한복판에 항아리를 놓고 편을 갈라 화살을 던지는 것이 전통 놀이법이지만 집에 있는 도구들을 활용해 보다 쉽게 즐길 수 있다. 빈 병이나 바구니 등을 놓고 일정 거리에서 동전이나 바둑돌을 던져 넣어도 좋다.

군사적 목적으로 시작된 ‘연날리기’
설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겨울철 바람을 이용해 연을 하늘에 띄우는 연날리기도 설 민속놀이 중 하나다. 과거 삼국시대에서는 연이 군사 목적으로 사용됐지만 이후 연날리기가 대중화가 되면서 민속놀이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정초부터 대보름까지 연날리기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특히 새해에 날리는 연의 의미는 특별하다. 연 위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는 글귀를 써 연을 하늘 높이 띄우게 되는데, 연을 멀리 날려 보내면 액운도 함께 쫓는다고 생각했다.


①가오리연
1) 종이를 정방형이나 마름모로 재단한다. 보통 연 크기는 가로, 세로 30cm 정도 안에서 조절한다. 뒷면 가운데에 중살을 붙인 다음, 허릿살을 양쪽 모서리 끝으로 휘어서 댓살을 세운 채로 붙이고, 모서리 종이로 싸 바른다. 종이와 댓살 사이가 뜨는 곳은 풀 바른 종이 조각을 발라 준다. 뼈대 붙이기가 끝나면 앞면에 색을 칠하거나 색종이를 오려 붙여 장식한다.
2) 아래꼬리는 5cm 넓이의 긴 종이 끝을 가위질하여 앞면에서 붙이되 귀꼬리는 20~30cm, 아래 꼬리는 2~3m 정도 길이로 한다. 바람이 꼬리를 타고 흘러 연의 균형을 잡아 준다.
3) 윗줄은 중살과 허릿살이 교차되는 지점에 댓살과 함께 묶고, 아랫줄은 윗꼭지에서 윗줄 묶은 만큼 간격을 아래 꼭지에서 띄워 묶어 준다. 줄 길이는 위아랫줄의 가운데를 잡고 윗꼭지와 아랫꼭지에 닿는 길이로 하되 아랫줄이 조금 긴 상태에서 목줄을 묶어 준다.

 

②방패연
1) 종이(창호지, 백지, 닥지 등)에 물에 축여 다림질해 질기게 만든 후 가로 40cm, 세로 60cm로 자른다.(가로 세로 비율은 2:3 유지)
2) 준비된 종이는 그림과 같이 8등분으로 잘 접어 맨 윗부분을 둥글게 2~3cm 정도 자른다. 접었던 종이를 다시 펴보면 중간에 방구멍(바람 구멍)이 나 있다.
3) 잘 마른 댓가지를 얇게 다듬어 뼈대를 만든다. ‘머릿살’은 다섯 뼈대 중 가장 튼튼하게, ‘허릿살’은 가장 가늘게 만들고, ‘중살’과 ‘장살’은 중간 굵기가 좋다. 가장 먼저 종이 맨 위 여분 밑으로 머릿살을 붙인 다음, 나머지 뼈대를 방구멍 중심점에 교차시켜 허릿살, 중살, 장살 순으로 풀칠해서 붙인다. 머릿살 양쪽 끝과 장살 위쪽 끝은 ‘활벌이줄’을 매기 쉽게 약간 튀어나오게 한다.
4) 맨 위 여분 종이로 머릿살을 싸 바른다. 뒤집어서 앞면에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써넣고 꼬리나 발을 달아 연을 개성있게 꾸민다.
5) 연 위쪽 머릿살과 장살이 겹쳐진 양쪽 끝을 20도 가량 휘어지게 활벌이줄을 맨다. 나머지 살이 앞으로 15도 가량 불룩하게 휘어져야 연이 잘 뜬다. 나머지 윗줄, 가운데 줄, 아랫줄을 맨 다음 네 가닥을 한곳에서 묶어 목줄을 만들고 그 끝에다 연줄을 연결한다. 윗줄은 A, B 각 지점에서 꽁숫구멍까지, 가운데 줄은 방구멍 중앙에서 윗줄, 아랫줄을 위로 당겼을 때 팽팽하게 되도록, 아랫줄은 꽁숫구멍에서 A나 B까지, 꽁숫구멍은 방구멍 중앙과 연 하단 중간에서 조금 내린 지점에 연결한다.
자료=네이버 지식백과


악귀 쫓고 복(福) 기원했던 ‘세시풍속’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를 지칭하는 날로,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설에 대한 유래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옛 문헌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설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9대 명절로, 조선시대에는 한식과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자리 잡았다. 시대에 따라 명절이 변했던 것처럼 설에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세시풍속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설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는 것 정도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전통 세시풍속을 옛 이야기와 함께 온가족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새해입는 새옷 ‘설빔’
설날 아침에 입는 새 옷을 말한다. 세장(歲粧)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어른들이 두루마기 또는 도포를 비롯해 버선·대님까지 새로 한 벌을 마련하고 바지와 저고리에 새 솜을 둬 엄동설한에 대비했다. 아이들은 색동옷으로 단장했으며 설빔으로 갈아입은 뒤 차례를 지냈다.

가정의 복을 기원했던 ‘복조리’
원래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다.
보통 가정에서는 몇 개를 한데 묶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매달아 두었다가 쓰곤 했는데 정월 초하루에 만들어 파는 조리는 특별히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름도 ‘복조리’라 불렀던 것이다. 정초가 되면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복조리를 나눠주는 이유는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의미다. 서로에게 행운을 기원하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한 해의 신수를 점쳤던 ‘청참’(聽讖)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새해 운세를 점치는 것처럼 과거에는 새해에 듣는 첫소리로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쳤다. 청참(聽讖)은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소리로 결정이 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야광귀 쫓으려 설날 밤에는 신 숨겼다
과거에는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고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었다. 선조들은 그 날 신을 잃어버리면 그 해 운수가 나쁘다고 믿었다. 그래서 설날 밤에는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고 잠을 청했다. 특히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뒀다.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양반집 부인 새해 인사 대신했던 ‘문안비’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설날에 여자가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못 했다. 그래서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신을 대신해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 새해 인사를 전했다.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했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줬고,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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