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삶이 어느 시점에 끝난다면 그것 또한 축복이다”
“고통스러운 삶이 어느 시점에 끝난다면 그것 또한 축복이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2.28 21:14
  • 호수 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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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17년간 최고의 명강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나, 영원한 삶은 가능한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후에 계속 존재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영생은 좋은 것인가. 미국 예일대 철학과 교수 셸리 케이건(58)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주제로 17년 동안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의 강의는 ‘열린예일강좌’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공개돼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서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그의 강의를 집약한 책 ‘Death’(죽음. 엘도라도刊)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쉬운 논리와 이성으로 답하고 있다. 책 내용을 요약했다.

 

▲ 케이건 교수는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기계라고 본다. 아무 결함 없는 기계로 태어나 점점 낡게 되고 부품을 교체하기도 하지만 결국 어느날 쓸모없이 돼버린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죽음의 요체이다.

영생 믿은 소크라테스, 유쾌하게 독약 마셔
‘걸리버여행기’는 영생을 끔찍한 형벌로 묘사


죽음이란 무엇인가

▲ 한국어판‘죽음이란 무엇인가’. 엘도라도 제공.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인간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 독약을 먹이거나 목을 조르거나 심장을 향해 총을 발사할 수도 있다. 심장마비나 뇌졸중, 암에 걸려 자연적으로 사망하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다양하지만 단순화해서 일반적인 단계로 요약해볼 수 있다.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면 혈액순환이 멈추면서 산소공급이 중단된다. 곧 뇌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진다. 산소결핍으로 인해 세포들이 신진대사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조직 손상이 영구적으로 일어나고, 필수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부패가 시작되면서 세포 조직이 허물어진다. 세포들이 정상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주요 조직들이 파괴되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죽음이 일어난 것이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나는 계속 존재할까. 이 질문에 우리는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 대답을 하기 전에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육체 그리고 육체와는 전혀 다른 정신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는 관점이다. 첫 번째 관점의 핵심은 육체와는 전혀 다른 정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일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돼 있고 육체와 영혼은 서로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육체는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이다. 무게로 달아볼 수도 있고 막대기로 찔러볼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영혼은 우리의 생각과 의식 그리고 인격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공간 또는 기반이다. 이런 관점을 우리는 이원론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관점은 일원론이다. 인간은 한 가지 기본요소 즉, 육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 이것을 우리는 ‘물리주의’라고 부른다. 인간은 육체에 불과하며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존재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죽음과 영혼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이원론자는 육체가 움직일 동안 영혼이 존재하며 육체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리주의자는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한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감으로는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오감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영혼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오로지 내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영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마음의 눈을 열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어보자. 지금 내 안에 영혼이 보이는가? 아마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면에서 우리는 다양한 감각을 발견하고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이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아니다. 여러분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외적 또는 내적인 감각으로 영혼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영혼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란 게 정말로 있다고 주장하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한다.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영혼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육체의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육체가 사망할 때 영혼도 얼마든지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미 영혼은 없다고 했기 때문에 불멸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이들이 영혼의 불멸성을 믿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살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육체가 죽은 다음에 영혼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근거는 있는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인 ‘파이돈’(phaidon)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플라톤은 대화의 형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기술한 대화편을 남겼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목으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료들과 함께 영혼불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영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약을 마신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영혼들이 함께 살아가는 신의 왕국을 믿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영혼은 세 가지 다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이성을 관장하는 합리적 부분, 의지와 같은 정신적 부분, 식욕 성욕 소유욕 등과 같은 욕망적 부분을 말한다. 영혼이 조합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의 다양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실제로 단순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거기서 우리는 불멸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단순한 존재인 영혼이 미래의 특정 시점에서 아마도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사람들은 죽음을 당연히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죽음은 왜 나쁜 것일까. 어떻게 죽음은 우리에게 악이 될 수 있는가. 죽음이 정말로 나쁜 거라면, 반대로 영생은 좋은 걸까. 죽음이 마지막을 의미한다면 나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처럼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고 믿는다면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죽음은 내게 그 어떤 악도 될 수가 없다. 죽음은 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 없고, 죽음이 나쁜 것은 오로지 살아있는 사람한테다. 독일의 시인 클롭슈토크의 ‘이별’이라는 시다.

시신이 우리 곁을 지날 때
당신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네.
“죽음이 두려운가?” “아니오”
그러면 뭐가 두려운 거지?
“죽어가는 과정이”

나는 그것마저도 두렵지 않네. “그러면 두려운 게 없는가”
아 나는 두렵고 또 두려워...
“대체 무엇이?”
친구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헤어짐은 나의 이별이자 또한 그들의 이별이기에.

그래서 나의 그늘은 영혼 깊은 곳에서
당신의 그늘보다 더 어둡다네.
시신이 우리 곁을 지날 때.

이 시인은 죽음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친구들과의 이별이 죽음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교통사고로 몸이 찢기면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과정에 겪게 될 고통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모두가 죽을 운명이라는 진실에 직면해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야할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 있을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삶에 대하여
삶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생이 아닐까. 만약 앞으로의 삶이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죽음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끝내는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좋은 것도 그 정도를 넘어섰을 때는 나쁜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콜릿을 한두 개 먹을 때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10개, 100개를 먹는다면 질려서 먹지를 못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50살, 80살, 100살로 넘어가는 어떤 시점에서 나쁜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영원히 죽지 않는 나라에 들어간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 그들을 처음 본 걸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환상적이군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되고 이로 인해 계속해서 쇠약해진다는 사실을 그때 걸리버는 깨닫지 못했다. 삶은 계속해서 힘들어지고 노화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모두 죽지 않고 살아가지만 정신은 희미하고 몸은 허약하고 병들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환상적인 곳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스위프트는 영생을 끔찍한 형벌로 묘사하고 있다. 영생이 정녕 이런 것이라면 죽음이 오히려 축복일 것이다. 몽테뉴 역시 노년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고통과 괴로움,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죽음을 축복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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