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달라지고 있다”… 서울동부지법서 ‘열린 법정’
“법원이 달라지고 있다”… 서울동부지법서 ‘열린 법정’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5.16 19:09
  • 호수 3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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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형사재판 방청 후 진지하게 ‘모의평의’
▲ 이 심 회장과 대한노인회 어르신들이 동부지법의 한 법정에서 모의평의에 앞서 재판장석에 앉아 재판 장면을 연출하며 웃고 있다.
▲ 이 심 회장이 간담회를 마친 후 이대경 동부지법원장(왼쪽에서 네 번째), 홍승철 수석부장판사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판사들 어르신들에 직접 카네이션 달아주기도

‘어디서 버릇없이 툭 튀어 나오느냐’ ‘노인은 늙으면 죽어야 한다’등 최근 법원의 잇따른 노인 비하 발언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한 법원에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국민과 소통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동부지방법원은 대한노인회 어르신들을 법원으로 초청해 실제 형사재판을 방청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모의평의 시간도 가졌다.

“실형인가, 집행유예인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5월 10일 오후 1시, 서울동부지방법원 15호 법정에서 최문수 판사(34)가 이렇게 말했다. 이 심 회장을 비롯한 대한노인회 노인지도자 10명은 ‘그림자배심원’으로 실제 형사재판을 1시간 동안 방청한 후 모의평의에 들어갔다. ‘모의평의’란 유·무죄를 가리고 형량도 결정하는 과정으로 실제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날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징역 5년형을 구형했다.
어르신 중 4명이 집행유예를, 6명이 실형을 주자고 손을 들었다. 최 판사가 이어서 “살인미수죄는 6년 6개월까지 가능하다. 얼마가 좋은가”하고 묻자 6명 전원이 1년~1년6개월을 택했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지난 3월께 47세의 노숙생활을 하는 피고인은 고시원에서 이복동생과 술을 마시다가 “남의 도움만 받지 말고 일을 하라”고 충고했다. 동생은 “형도 노숙자인 주제에 누구한테 훈계하느냐“고 무시했다. 피고인은 화가 나 책상 위의 칼을 들어 “죽여 버린다”면서 동생의 좌측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 부분을 1회 찔렀다. 피고인은 현장을 피한 사이 고시원 주인이 동생을 발견해 119에 신고, 봉합수술을 받았다. 재판 현재 동생은 상처를 회복했다. 초범인 피고인은 전에 머리를 크게 다쳐 뇌수술을 받은 병력이 있고, 평소 술자리에서 자기보다 힘이 센 동생에게 맞기도 했다.
최 판사는 “가정의 달을 맞아 형제간 불화사건 재판을 통해 어르신들의 슬기로운 지혜와 고견을 듣고자 마련한 자리였다”면서 “어르신들이 신중하게 내린 평의 결과를 재판에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평의 과정에서 어르신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이 심 회장을 비롯한 6명의 어르신은 “칼로 찌른 행위는 분명 살인미수이며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해 어호선 이사 등 4명은 ‘살인의 의도가 없고, 감옥에서 더욱 나쁜 범죄를 배우고 나와 재범의 위험이 높을 수 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택했다. 어르신들은 모두 ‘술이 만취상태라고 해서 감형은 안된다’고 입을 모았다. 술로 인한 실수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대한노인회와 서울동부지법이 공동주관한 ‘어르신과 함께하는 열린 법정’의 일환으로 1시간가량 진행된 모의평의를 마친 일행은 법원 5층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약 1시간 동안 간담회를 가졌다.
이 심 회장은 과거 막말 판사의 발언을 의식한 듯 “대한노인회 회장을 보니까 어떤가, 노인은 허리가 구부러지고 힘이 없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대한민국 어르신들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부양받는 대상이 아니고 사회를 책임지는 노인”이라고 말해 판사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 회장은 이어서 “지하철 무임승차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노인이 집에만 있으면 형제간 반목만 생기고, 병 나면 의료비 들어 국가적으로도 손해다. 노인이 지하철 타고 밖으로 자꾸 나다녀야 가정과 국가에 이익인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 심 회장은 또, 과거 소송 경험을 소개하면서 판사의 독립적이고 공정한 판결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설령 판사가 흔들리지 않고 법리에 따라 재판을 하더라도 밖에서는 재판이 개인적 연고나 학연 등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본다”며 “법원과 국민의 소통이 원활하면 이런 불신도 사라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대경(55) 서울동부지방법원장은 “우리 법원에서는 그동안 찾아가는 법률문화교실을 개설하고 재판만족도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다각도로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음을 알고 있다”면서 “어르신들이 사회와 국가를 이룬 경륜과 지혜로 우리 법원의 재판과 각종 사법 작용에 있어 개선할 점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강기찬 세종특별자치시지회장은 “오늘 재판이 막말 안하고 윽박지르지 않고 온건한 대화로 진행되는 것을 봤다. 많이 발전한 걸 느꼈다”고 말했다.
예병옥 경북연합회장은 “온갖 희생을 다해 아들을 판검사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 부모는 술이나 얻어 마시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런 사정을 참작해 노인재판에서 너그러운 판결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태진 대한노인회 이사는 “국민과 소통하려는 법원의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이런 모임이 확대되고 여러 계층으로 확산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승욱 부장판사는 “70대 노인이 정신병 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가족들은 자기들이 돌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안 선다”면서 참석자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에 대해 어르신들은 “자식들이 재판 중에는 설령 그렇게 얘기하더라도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를 제대로 돌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간담회에선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고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어르신들의 협조가 중요하다’ ‘가족 간 재산을 둘러싼 소송이나 문중 사건의 경우 어르신들의 중재적인 역할을 바란다’는 말들이 나왔다.
참석자들은 간담회 후 단체기념촬영을 끝으로 이 날 행사를 마무리했다. 행사 시작 전 판사들은 어르신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기도 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이 심 회장, 박정진 부회장 겸 부산연합회장, 예병옥 경북연합회장, 강기찬 세종특별자치시지회장, 고세일, 어호선, 장해익, 정태진 이사, 박정근 광진구지회장, 류춘선 영등포구지회장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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