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없는 형님 한 풀어 달라”
“호적 없는 형님 한 풀어 달라”
  • 조종도 기자
  • 승인 2013.06.14 10:12
  • 호수 3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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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후퇴 때 월남해 국군 입대… 공비 토벌 중 전사

유일한 혈육 82세 동생의 울분 “국가유공자 혜택 못 받아”
징용피해자는 ‘등재’ 가능…월남한 전사자에게도 기회 줘야

▲ 한국전쟁 중 전사한 고 김정두씨의 호적(현 가족관계등록부)을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동생 김정칠 어르신.

2013년 6월 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현충원 묘역. 17만2000여명의 순국선열이 안장된 이곳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현충일 추념식이 열렸다. 6·25 전사자의 동생 자격으로 평생 처음 초대받은 김정칠 어르신(82)은 이날 추념식 내내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박 대통령은 이날 추념사를 통해 국가유공자 지원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해 예우와 존경을 다하는 것은 후손들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순국선열과 보훈 가족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최대한 해서 국가가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하고….”
김 어르신은 대통령의 메시지에 머리를 주억거리면서도 가슴이 칼끝으로 도려내진 듯 아파와 견딜 수가 없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울분이 솟구쳐 올랐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 형은 호적(현 가족관계등록부) 조차 없어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하고 저렇게 쓸쓸히 묻혀 있건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UN연합군은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극적으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다. 하지만 승전가도 잠시,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연합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다시 평양을 내주고 이듬해 1월 4일 서울까지 내주는 1.4후퇴를 경험하게 됐다.
당시 만 22세, 19세 청년이던 김정두·정칠 형제는 평양 근처인 평남 대동군 남곤면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으로 피난을 하게 됐다. 살인적인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가까스로 서울에 도착한 정두·정칠 형제는 국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두 형제는 남한에 호적이 없는 무적자(無籍者) 신분이었다. 하지만 병사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월남한 두 청년이 국군에 입대하는 데엔 아무 제한이 되지 않았다. 형 김정두씨는 8사단에 배속돼 전라도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하다 전사한다.
동생 김정칠씨가 형의 사망 사실을 안 것은 30년이 흐른 1980년대 초였다.
“저는 53년 휴전 직전에 제대해 보호시설에 있다가 운전을 배워 취업했습니다. 이후 형님의 신상을 찾아 수소문한 끝에 육군본부에서 ‘전사’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형님 유해가 대구 달성공원의 절에 모셔져 있는데, 국군묘지로 이장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가가 전사자 김정두 일병에게 한 예우는 국군묘지에 안장한 것이 끝이었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보상을 받는 유족 또는 가족의 범위를 본인, 배우자, 자녀, 부모 등 직계가족으로 제한하고 있어 유일한 피붙이인 동생에게는 아무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6·25때 전사한 사람은 가족이 신청하면 국가유공자로 보훈처에 등록될 수 있었지만 고 김정두 일병은 그런 길이 막혔다.
“동생은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도 국가에 대해 원망할 틈도 없이 생활전선에 쫓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도 늙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니 형님을 저 상태로 두고 갈 수는 없더군요. 이대로 죽으면 형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기억되지 않을 것 같아 어떻게든 형님을 가족관계등록부(이하 가족부)에 올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나 법원은 2008년 1월 1일 호적법 폐지로 이미 호적에 올릴 기회도 놓쳤고, 동생은 국가유공자에 관한 자격이 없다는 원칙적인 답변만 되풀이했다.
심지어 그는 보훈처 관계자로부터 “고 김정두씨가 형님이 맞느냐.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동생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증인을 세워서 증빙서류를 제출하고, 보훈처장 면담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 어르신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형의 가족부를 만들기 위해 가정법원에 소송을 하면서 독립유공자의 경우 무적자라도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실제로 국가는 독립유공자뿐 아니라 일제 징용피해자의 경우도 가족부에 등재할 수 있도록 처리규칙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김 어르신은 “저의 형님은 그렇게 외롭게 전사했는데 국가가 외면하면 되겠느냐”며 “독립유공자나 일제 징용자에 준해 가족부를 만들 수 있도록 법적인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국가유공자는 유공자 본인 또는 가족에 혜택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본인과 유족이 사망하면 제적처리 한다”면서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이 안 됐다고 해서 국가유공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의 말은 모순이다. 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있지 않으면 국가유공자란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다. 국립묘지에 안장될 대상자에 대한 조항(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도 ‘국가유공자 예우법’ 등을 준용해 적용하고 있다.
“형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뛰어다니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있다’는 말이 구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 국가가 저의 형님의 희생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 어르신의 간절한 호소는 우리나라 보훈행정에 사각지대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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