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얼이 커서 神이 되는 사람”
“어르신은 얼이 커서 神이 되는 사람”
  • 이다솜 기자
  • 승인 2013.06.28 14:55
  • 호수 3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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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의 ‘행복의 열쇠가 숨어 있는 우리말의 비밀’

언어학적 자료보다 저자의 직관에 근거
자극적 소재 없이도 베스트셀러 6위‘쾌거’
조화로워 ‘좋다’, ‘나뿐’이라서 ‘나쁘다’

 

우리는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매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공기, 물 등이 대표적인 예다. 어쩌면 우리말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아침에 눈을 떠 늦은 밤 다시 잠들 때까지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말을 듣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소중한 우리말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심지어 말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뜻을 담는 껍데기 또는 빈 그릇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승헌(64)씨는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든다. 2011년 미국에서 ‘세도나 스토리’를 출간, 한국인 최초로 뉴욕타임즈 등이 선정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올봄 우리말에 주목한 책 ‘행복의 열쇠가 숨어 있는 우리말의 비밀’을 펴냈다. 저자는 우리말에 깃들어 있는 얼을 인식하고 되살림으로써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힐링(healing) 에세이도, 자극적인 내용의 소설도 아닌 이 책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온라인 주간 집계(6월 4주차 기준)에서 6위에 오르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말은 그저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유독 말을 하는 존재가 된 것은 사람에게 정신이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정신의 산물입니다”라고 강조하며 “우리말은 어떤 정신에 뿌리를 두었을까? 우리 한국 사람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김호일 명예교수가 추천사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언어학이나 역사학에 기초하기보다는 만화까지 곁들여 우리말 속에 숨어 있는 참뜻을 알리는데 집중한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우리말의 언어학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학문적 접근보다는 저자가 우리말에서 직관적으로 얻은 통찰과 혜안이 주는 의미에 집중하며 읽어야 한다.
이씨는 우리말이 얼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력을 취하며, 그 힘으로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문화를 키워왔다고 말한다.
우리말 얼은 보통 한자말 ‘정신’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지만, 정확히 구분하면 정신 중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의식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씨는 “정신은 우리의 생각, 정서, 감정 같은 온갖 종류의 의식을 포괄하는 데 비해, 얼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생명의 뿌리에 잇닿아 있다”며 “양심이나 신성(神性)은 얼에 아주 가까운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얼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단군왕검이 고대국가 조선을 개국하며 공표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꼽는다.
이씨는 이에 대해 “서로 도우며 모두 평화롭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이를 국민과 이웃나라에 제안한 것”이라며 “선각의 가르침이자 공동체의 문화 풍토 속에서 탄생한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실업, 중산층 몰락, 학교폭력, 노인빈곤 등의 각종 사회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필요한 것은 보수와 진보, 여와 야로 나뉜 대립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의 구현이다. 이때 저자가 생각하는 새로운 정신이 바로 홍익정신 이화세계라는 공생공존의 가치라는 것.
저자는 ‘얼굴은 왜 얼굴일까?’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우리말에 대해 고찰한다. 우리 생활 습관에는 얼굴을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와는 다른 맥락이다. ‘나이 마흔이면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흔히 쓰이며, 얼굴의 생김새로 운명을 판단하는 관상학이 발달하기도 했다.
또, 얼굴은 명예나 양심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실수를 하거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 ‘얼굴을 못 들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잘못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낯짝’이라고 낮춰 부르며 썩은 양심을 비난하기도 한다.
저자는 “얼굴은 ‘얼’과 ‘굴’로 이뤄진 순우리말”로 “얼굴이란 얼이 깃든 골 또는 얼이 드나드는 굴”이라고 설명한다. 예부터 얼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해왔던 것도 얼굴이 얼을 드러내고 반영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얼이라는 말은 그 본래의 뜻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어휘로 파생돼 쓰인다. 얼이 간 사람을 ‘얼간이’라 부르고, 얼이 익지 않아 어설픈 상태 또는 얼이 썩었다는 뜻으로 ‘어리석다’는 말을 쓴다.
사람의 연령에 따라 시기별로 어린이, 어른,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얼에서 비롯된 말이다. 얼이 덜 성장한 사람을 어린이, 얼이 큰 사람을 어른, 얼이 커서 신이 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어르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르신이라는 말 자체에 지혜를 갖추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어른이라는 말 역시 그 자격과 책임이 이미 말 속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또, “환갑이 지나 백발이 되었다고 누구나 어르신으로 불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 자체에 담긴 얼의 기준을 충족해야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어르신으로서 공경 받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덧붙인다.
‘좋다’ ‘나쁘다’라는 말에 대한 통찰도 흥미롭다. ‘좋다’는 말에는 조화롭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우러지는 것을 뜻한다.
반면, ‘나쁘다’는 ‘나뿐’인 상태여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않은 것,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심에 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흔히 사용하는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라는 말에는 상대방을 높이는 의미가 녹아 있다. 먼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고마’는 풍요의 신을 의미한다. 즉, ‘고맙습니다’는 ‘고마와 같습니다’라는 뜻으로 도움을 준 사람을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하며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반’도 신을 의미해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는 ‘당신은 신과 같이 크고 밝은 존재입니다’라는 찬사를 보내는 셈이라고. 이씨는 “우리말은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을 ‘신’으로 보는 특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가 펼치는 이야기에 구태여 ‘타당성’이나 ‘정확성’의 칼날을 겨눌 필요는 없다. 우리말을 통해 얼을 읽으려고 했던 그의 의도에 동의한다면, 그저 재미있는 옛 이야기를 읽듯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기면 된다. 활자 사이의 넉넉한 여백과 작가 호연의 만화가 주는 기쁨은 덤이다. 이 책을 통해 매일 사용해왔지만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우리말을 다시 더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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