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은 멋진 ‘이별파티’… 죽음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
장례식은 멋진 ‘이별파티’… 죽음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7.11 19:24
  • 호수 3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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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 등 빈소, 붉은 장미꽃으로 장식
▲ 지난 5월 7일 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한 시흥장례원에서 열린 추모음악회 광경. 이곳에서 화장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공연이었다(사진 제공=이랑엔터테인먼트). 사진 오른쪽은 분당메모리얼파크에 있는 코미디언 백남봉의 묘비. 활짝 웃는 얼굴은 드문 경우다.

닥터 이재락, 사망 직전 지인들 초대 즐겁고 훈훈한 정담 나눠
영화감독 박철수 ‘바람이 분다, 모여라’ 등 비문 개성 묻어나


“내 장례식엔 모두가 화사한 복장으로 꽃을 들고 생전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참석했으면 좋겠다.”
한국화의 대가 고 송수남(75) 화백의 유언이다. 화사한 꽃을 즐겨 그린 ‘꽃의 화가’ 다운 말이다. 송 화백은 지난 6월 8일,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눈을 감았다. 다음날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는 여느 빈소와 사뭇 달랐다. 활짝 웃는 영정사진, 흰 국화 대신 색색의 온갖 꽃이 가득했다. 검은색 조문 복장을 입고 온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장례식장 풍경이 바뀌고 있다. 굳은 얼굴의 영정사진, 슬픔에 가득 찬 유족과 조문객들, 검은색 한복과 흰 국화꽃으로 정형화됐던 장례식 분위기가 화려하고 공연장 같은 공간으로 진화되고 있다. 심지어 와인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2011년 2월에 사망한 국내 첫 유학파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79)는 평소 가족과 지인에게 자신의 빈소에 “흰 꽃은 싫어, 예쁜 꽃을 가져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진 빈소는 그의 말대로 아름다운 꽃의 향연이었다. 핑크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영정사진에 재즈풍의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그의 수제자인 이희 헤어디자이너 등 지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고인은 이렇게 유언했다고 한다.
“나 죽으면 장례식장에 하얀 꽃을 꽂고 질질 울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핑크와 빨강 장미꽃으로 장식해줘. 올 때는 제일 멋진 옷을 입고 예쁘게 꾸미고 와. 제사는 말고 내 생일 날 집에 다들 모여 맛있는 음식 차려놓고 와인 한 잔 마시면서 지내. 탱고를 춰준다면 얼마나 멋있겠니.”
지금도 그의 제자들과 자녀들은 그의 생일에 모여 와인을 마시고 고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눈다. 이희 씨는 “누구나 태어나면 한 번은 가는 것이고 제 살길을 다 살고 가니 억울할 것도 없으며 다만 오늘을 성실하고 멋있게 살면 그 뿐이라고 언제나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은 국악을 감상하며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일본에 살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74·한국명 유동룡)의 빈소. 친지들은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영화 ‘서편제’의 가락이 흐르는 가운데 고인이 직접 레이블을 디자인한 와인을 나눠 마시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타미 준이 지은 제주의 방주교회는 유명한 건축물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높고 화려한 강대상(설교대)을 만들어 목사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지만 방주교회는 꼭 초등학교 책상 크기의 아무런 치장이 없는 자그마한 철물로 된 강대상을 교단 중심 맨바닥 위에 놓았다. 신 앞에 인간은 누구도 높은 자, 낮은 자가 있을 수 없고, 차별 받아서도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강대상 뒷면의 유리창을 통해 물과 함께 산방산이 내려다보이는 제주의 풍광이 자연 그대로 들어온다. 그는 2011년 6월 26일 사망했다. 유해는 선산인 경남 거창과 제주에 반반씩 뿌려졌다.

화장장 행 버스 안에서 고인 동영상 틀기도
이들은 모두 사후의 장례식을 이색적으로 꾸몄다. 그런데 한술 더 떠 생전에 장례식을 치른 이가 있다. 그것도 즐거운 파티처럼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해 노래를 불렀다. 캐나다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지난 2012년 담낭암으로 사망한 이재락(83) 박사. 그의 장례식은 본인이 주도한 ‘이별파티’였다. 그는 “죽어서 장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을 때 인생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다”며 자신을 진료한 의사들의 의견을 종합해 앞당겨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그는 2012년 6월 9일 캐나다 뱅큇홀 ‘타지’에서 가족 친지들 300명을 불렀다. 이날 장례식은 △이 박사의 인사말 △가족 소개 △헌시 △지인들이 말하는 ‘나와 이재락 박사’ △장남의 노래 △색소폰·클라리넷 연주 △아들 3형제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합창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엔 부조나 선물을 일절 받지 않았다. 초대받은 이들이 대부분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년층이라 적은 돈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 박사의 판단에서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이 박사의 당부대로 화사한 외출복이나 가벼운 평상복 차림이었다. 이 박사는 이로부터 5개월 후인 11월 13일 눈을 감았다.
경북 안동 태생인 이 박사는 서울대 의대 졸업과 동시에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대학병원에서 내과수련을 쌓았다. 1963년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정착해 온타리오 왕립의학원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연방 최고 권위의 학위다. 한국인으론 두 번째로 알려져 있다. 토론토 블루어 코리아타운 내에 병원을 개업, 2000년대 후반까지 일했다.
사전에 동영상을 제작해 슬픈 작별의 순간을 뜻 깊고 다정한 시간으로 만든 이도 있다. 60대 남자가 세상을 떠난 뒤 화장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생전에 녹화한 영상을 틀도록 했다. 이 영상에는 고인이 직접 나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궂은 날씨에 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비록 먼저 다른 곳으로 가지만 사는 내내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라고 말해 추모객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날씨를 대비해 화창한 날씨부터 찌푸린 날씨까지 각각 다른 인사말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준비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는 후문이다.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을 공저로 펴냈고 ‘생사학’(삶과 죽음에 대한 연구)을 강의한 바가 있는 정현채 서울대 의대 내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15년 전쯤에 있었던 이 얘기를 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가끔 강의에서 이야기한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은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서울대 의대 홈페이지의 교수 소개 난에 이런 글을 적어놓기도 했다.
“전공 이외에 하는 일로는 사람들과 함께 수시로 와인을 마시는 일이고, ‘와인과 건강’에 관한 특강도 10년 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임종 직전에도 비싸지 않으면서도 좋은 와인을 마시기를 희망하여서, 와인 잔 들고 좋아라 웃고 있는 사진으로 미리 영정을 준비해 놨습니다. (중략) 죽음을 직시하여 가능한 일찍 각자의 죽음관을 갖도록 권유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개성 톡톡 튀는 비문들
장례식장에서 다수의 고인을 떠나보내는 추모공연이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5월, 시흥장례원. 이곳에서 화장을 지낸 망자 20여명의 영혼과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공연이 열렸다. 해금, 가야금 등 국악 연주에 맞춰 소리꾼들이 ‘사철가’와 ‘한오백년’을 불렀다. 이날 공연을 진행한 이랑엔터테인먼트 왕규식 대표는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이 문화 예술의 출발이다. 위로·치유·공감으로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가꿔 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9월에도 공연이 있을 예정이다”고 밝혔다.
장례식에 대한 의식의 변화는 젊은 층일수록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프랑스식당 ‘루이쌍끄’의 이유석 셰프는 “프랑스요리 ‘테린’과 어울리는 보졸레 지방의 ‘모르공’ 와인을 마시며 나를 추억해준다면 그것으로 나는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다 갔다고 여길 것이다”고 했다. 그룹 ‘크리잉넛’의 베이스 한경록은 “내 장례식에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좋겠어. 아니 아예 밴드들이 신나게 공연하고 사람들은 춤추고 즐겁게 보냈으면 좋겠어. 매년 내가 죽은 날짜에 록페스티벌을 여는 거야. 최고의 록페스티벌을 만들어 후배 로커들 개런티도 두둑이 챙겨주고, 남은 수익금은 불우이웃들과 아이들을 위해 쓰는 거야. 그러면 적어도 즐겁고 마음 따듯하게 나를 기억해줄 수 있겠지”라고 했다.
장례식 뿐이 아니라 비문도 개성 있게 변하고 있다. 고 박철수 감독은 자신의 묘비명에 ‘바람이 분다, 모여라!’라고 썼다. 가객 김현식의 추모비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합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코미디언 김미화는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비문을 택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분당메모리얼파크 공원묘역엔 ‘여기도 참 좋다’ ‘아름다운 이 세상 잘 다녀갑니다’ ‘지구별에서의 아름다운 인연을 추억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등 개성 있는 비문이 많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웃으며 떠나자”
죽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죽음을 재앙이나 고통으로 여기거나 앉아서 당한다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죽음도 삶의 동반자로 여기며, 생을 긍정적이고 뜻 있게 마감하고자 하는 의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죽음학개론’ ‘임종 준비’ 등의 책을 펴낸 최준식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한국죽음학회 회장)는 “사람이 70~80년을 살았다면, 어떤 일을 해 왔든지 간에 고되고 수고로운 삶을 산 것이다.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 놓고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남은 가족들이 한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본인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아닐 수 없다”며 “젊어서부터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해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수의를 입히는 관습에 대해서도 “고인이 평상시 즐겨 입던 옷을 입히는 편이 고인을 위해서나, 경제적으로나 좋다”고 제안한다. 실제 원불교에서는 수의를 입히지 않는 것을 일찌감치 가이드라인으로 정했고, 요즘 이런 풍습이 늘고 있다고 최 교수는 전한다.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는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를 마지막 기회로 삼고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단계인 유언을 작성할 때 세속적인 것에는 미리 신경을 꺼버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고맙다, 용서한다, 용서해 달라’는 얘기를 남기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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