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화가 위해 음악회 열어…
화가는 유언으로 그림 선물
암 투병 화가 위해 음악회 열어…
화가는 유언으로 그림 선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8.09 10:07
  • 호수 3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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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김녕만·서양화가 김치현의 숨겨진 우정
▲ 김치현 화백이 마지막 떠나는 길에 김녕만 대표에게 선물한 작품 ‘봄봄’.

“촌놈의 한계를 이겨내는데 서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고향 선후배… 1974년 ‘녕만 형에게 보낸 편지’ 고이 간직
김녕만 사진가, 암 완쾌 기원 음악회서 34년만에 답장 읽어

 

▲ 김녕만 대표의 지인들과 김치현 화백의 지인들이 부안의 금구원조각공원에 모여 김 화백의 쾌유를 기원하는 음악회를 열었다. 첫줄 가운데 주홍색 점퍼를 입은 이가 김치현 화백.

사람은 평생 가슴 속에 잊지 못할 사람, 잊지 못할 장면을 하나씩은 간직하고 살아간다. 40여년 사진 외길을 걸어온 김녕만(64) ‘사진예술’ 대표에게 고향(전북 고창) 후배인 김치현 화백(1950~ 2009)은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김 대표는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살아가는 데 용기를 주고 또한 늘 깨어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김치현이 내게 그런 사람이다”고 말했다.
김 대표에게 잊지 못할 장면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5월 어느 날 밤, 전북 부안의 금구원조각공원(관장 김오성)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의 상기된 얼굴, 무대 위 그랜드피아노가 달빛에 환하게 빛났다. 이날 공연 타이틀은 ‘김치현·김영선을 위한 달빛음악회’. 김치현은 전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서양화가이고, 김영선은 성악가이다. 김영선씨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속칭 ‘캔서(암)대학 졸업생’이었고, 김치현 화백은 3년 전 대장암에 걸려 투병 중이었다. 김 대표는 “성악가에겐 축하의 뜻으로, 화백에겐 완쾌 기원을 위해 우리 부부가 음악회를 기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부인 윤세영(57)씨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수필가이자 ‘사진예술’ 편집장이다.
원래는 가족끼리 조촐하게 하려던 것이었지만 입소문이 퍼져 서울과 전북 지역의 예술인들과 의사, 교수 등이 합류해 참석자가 60여명으로 불어났고, 분위기도 뜨거웠다. 특히 부안의 ‘나사모’(나무를 사랑하는 모임·회장 박경하) 회원들은 다과상을 준비하는 등 힘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김오성 관장은 이날 공연을 위해 건물 안에 있던 그랜드피아노를 분해해 무대로 옮겨 조립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영선씨가 ‘못 잊어’ ‘얼굴’을 불렀고, 참석자 모두가 ‘고향의 봄’ ‘반달’을 합창했다. 잠시 후 김 대표가 무대에 오르더니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사를 스무 번인가 하면서 그때마다 짐을 정리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곤 했는데 34년 동안 간직한 편지가 있습니다. 받는 사람 서울시 영등포구 흑석동 서라벌예대 사진과 김녕만, 보내는 사람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선유2리 한우석씨 방 김치현….”
순간 김 화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34년이나 보관하고 있다니…. 김 화백의 머릿속에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녕만 형이 어렵게 학교 다닐 때였고, 나는 임진강에서 소대장으로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김 대표는 10원짜리가 붙어 있는 그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젊음을 마음껏 예술창작에 쏟아 부으며 여념이 없을 녕만 형께 편지를 보냅니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향하여 뛰어다니는 녕만 형 (중략) 예술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녕만 형,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1974년 3월 28일.”
김 대표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이 편지의 답장을 34년 만에 보냅니다”고 말한 후 준비해온 글을 낭독했다. 김 화백은 선배의 깊은 배려와 갑작스런 답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화백, 지금 34년 만에 보내는 나의 답장이 너무 늦은 편지가 되지 않게 해준 것에 감사하고 있네. 3년 전 그렇게 큰 수술을 받으면서도 알리지 않아 무심한 선배가 되고 말 뻔 했는데 나로 하여금 이렇게 늦은 답장이나마 쓸 기회를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어. 그래서 달빛도 아름다운 지금 이 자리는 김 화백에게 못다 표현한 나의 애정을 보내는 자리이기도 하고 여기 참석하신 예술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에 대한 나의 사랑 고백이기도 해.”
깊고 푸른 산속의 밤, 김 대표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참석자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의 편지 낭독이 이어졌다.
“우리가 고창 시골에서 세련된 문화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예술이란 말조차 낯설었던 성장기를 보내면서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예술가를 꿈꾸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서 얼마나 덜 외롭고 든든했는지 이제야 말할 수 있네. 그동안 김 화백은 전주에서, 나는 서울에서 각자 활동하는 공간은 달랐지만 촌놈의 한계를 이겨내며 스스로 자기의 길을 만들어 나가고 그 길을 한 발 한 발 성실하게 걸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 화백은 늘 잊지 않고 조용하지만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었지.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김 화백이 고향 후배라는 사실이 항상 자랑스러워. 그런데 2년 전 내 전시회에서 김 화백의 동생이 한참 망설이다가 ‘형님이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고 내게 말해주었을 때 얼마나 좌절되던지 한동안 망연자실했었지. 서로 바쁘지만 언젠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여겨 충분한 사랑과 넉넉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내 어리석음에 기가 막히고 화가 나기도 했어. 오늘에야 내 편지함에 보관된 김 화백의 편지에 답장을 하듯이 나는 항상 김 화백의 정성에 답이 모자란 선배였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네.”
김 화백은 갑자기 몸이 추워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반달만 떠있고 별들은 숨어버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곳곳에서 눈물을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 대표의 목소리가 귀에 아득히 들려오기도 했다.
“내 기도로만은 부족함을 알기에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성원을 모아 김 화백 자네의 완쾌를 비네. 지금까지 그랬듯이 잘 견뎌내어 여기 계신 김영선 선생님처럼 2년 뒤에는 멋진 졸업식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네. 그때는 오늘처럼 나의 늦은 답장이 아니라 누구보다 축하하는 기쁨의 편지를 쓸 작정이라네. (중략) 이 아름다운 봄밤에 내 답장을 받아줄 김 화백이 있어 정말 기쁘네. 그럼 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그리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네. 2008년 5월 11일 김녕만.”

▲ 김치현(중앙) 화백은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전시회에서 하객들을 맞이했다. 김녕만(오른쪽) 대표는 동아일보 사진기자 시절 판문점과 광주민주항쟁을 취재했고, 청와대출입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김치현 화백은 조선대 미술과·동대학원을 나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고인을 기리는 ‘김치현미술상’을 제정, 젊은 미술가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상을 주고 있다. 사진 제공=김녕만 대표

진실로 위하고, 진실로 아끼는 선배의 사랑이었고 감사로 가득한 편지였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김 화백은 너무나 감정이 복받쳐 올라 도저히 인사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 화백은 당시 감정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김 화백의 홈페이지는 지금도 열려 있다.
“제 일생을 통해 가장 큰 행복이고 참을 수 없는 벅찬 감동입니다. 저는 이 기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녕만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보낸 편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34년을 보관하시다니 저는 수술하고 2년4개월째 투병하고 있는데 오늘밤 깨끗이 완쾌될 것 같습니다.”
김 화백은 실제로 이날 공연 이후 활발한 예술 활동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외국 초청도 받고, 서울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김 화백의 그런 모습을 보고 병도 나아가고 여러 가지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루는 나에게 전시회에 쓸 도록에 글을 써달라고 해 속으로 ‘미술 전문가도 아닌 나에게 뭘 그런 걸 부탁하나’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본인은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부탁을 했던 겁니다.”
김 화백은 2009년 5월 19~24일 전주교동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김 대표는 도록에 이런 말로 후배의 전시를 축하해주었다.
“음악회 이후 우리의 애정이 효험을 보았는지 건강도 좋아지고 경사도 잇따라 우리 모두 행복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초대전을 갖게 되었다니 내 전시 이상으로 기쁘고 즐겁다. 김 화백의 그림을 통해 나는 우리의 고향을 본다. 복사꽃이 아른거리고 보리밭이 물결치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나물을 캐고 있고 그 뒤로는 고향의 전설이 보랏빛으로 아롱진다.(중략)”
전주 전시를 끝내고 그 해 6월 4일부터 고창고인돌미술관에서 ‘김치현 작품 기증전’이 열렸다. 당시 기증전에서 김 화백을 만난 윤세영 편집장의 회고.
“암 투병 중인데도 얼마나 밝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을 그리는지 그의 작품을 보면 더 가슴이 아프고 먹먹했다. 차마 야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눈을 피하는 내게 휠체어에 앉은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프긴 하지만 행복해요.’”
김 대표는 그로부터 사흘 후, 김 화백의 부음을 들었다. 전시장에서 일일이 작품을 설명하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말대로 전시 중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이 아닌 전시장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다 만나보고, 그들에게 작품설명도 해주고, 그리고 그를 낳아주고 키워준 고향에 작품을 맡기고 훌훌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김 화백은 먼 길을 떠나면서 우리 부부에게 마지막 선물을 보냈어요. 그게 더 가슴에 남아요. 4년 전 지금처럼 더운 여름날, 그가 소포를 보내온 겁니다.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전율이 스쳤어요. 뜻밖의 선물을 받고 망연자실해 있는데 그 친구의 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아빠가 그 그림을 꼭 선생님에게 보내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그림은 우리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따듯한 고향을 초록색·파란색·분홍색 동심의 붓으로 그린 추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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