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은 무더위 잊으려 책을 손에 들었다”
“조선 선비들은 무더위 잊으려 책을 손에 들었다”
  • 정리=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8.09 10:45
  • 호수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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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책의 중요내용 반드시 기록하며 읽어
김득신 - 읽고 또 읽고… 59세에 과거 급제 ‘독서광’

 

 

 

▲ 경북 안동에 위치한 병산서원 만대루. 주변에 배롱나무꽃이 많다. 병산서원은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지은 서당이다.
무더위를 쫓는 방법 중 하나가 책 읽기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독서의 계절 가을보다 여름에 책을 더 많이 보는 경향이 있다. 책읽기는 노년의 건강에도 좋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치매를 예방하는 생활실천 가운데 하나로 하루 30분 이상 독서와 글쓰기를 권장한다. 정약용은 어떻게 공부했기에 500여권의 책을 썼고, 율곡은 어떻게 공부했기에 아홉 차례나 과거에 급제했을까. ‘48분 기적의 독서법’으로 서점가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김병완씨는 이런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린다. 그가 최근에 쓴 ‘선비들의 평생공부법’(이랑)을 요약한다.

 

 

조선 최고 지식경영의 대가 정약용(1762~1836)은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500여권의 책을 썼다. 그는 “100년도 살지 못하는 삶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살다간 보람을 어디에서 찾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의 공부법은 초서법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베껴 쓰는 것을 필사라고 한다. 다산은 필사가 아닌 중요한 내용을 골라 뽑아서 기록하는 공부법을 선호했다. 다산의 기록하는 공부는 마오쩌둥의 독특한 공부법과 매우 닮았다. 마오쩌둥은 ‘붓을 움직이지 않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고 말했다. 다산의 공부법은 세종대왕의 공부법인 ‘백독백습’과도 닮았다. 아버지 태종이 책을 주면 세종은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손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세종은 사서삼경을 비롯해 어떤 책이든 밤을 새워가며 읽고 한 번 읽을 때마다 동시에 한 번을 쓰고 바를 정자를 표시해나갔다. 중요한 것은 세종이 이것을 열 번이 아닌 백 번을 했다는 것이다. 다산과 세종의 공부법의 공통점은 책을 읽으면서 손을 움직여 필기를 했다는 점이다.
조선 500년 역사 동안 가장 많은 사직상소를 올린 학자 명재 윤증(1629~1714). 그에게 벼슬을 하사하는 교지가 끊임없이 내려왔지만 그는 그때마다 이를 마다하고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공부하라고 말했다. 공부하는데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재의 지론이다. 시간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한다는 사람이나 장소가 없어서 공부하지 못한다는 사람은 모두 명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차기(箚記 : 책을 읽고 얻은 바를 기록하는 것)공부를 강조했다. 공부하다가 의심이 생기면 반드시 기록하라고 조언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기록해놓으면 다시 그것에 대하여 궁리를 하게 되고 언젠가는 스스로 그 이치를 터득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조선 최고 ‘공부의 신’은 과거시험만 놓고 볼 때 율곡 이이(1536~ 1584)다. 율곡은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과거시험에 장원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기호학파를 형성한 이이는 ‘격몽요결’을 통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공부하지 않으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막히고 식견이 좁아지므로 반드시 글을 읽고 이치를 구하여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밝히고 실천을 통해 중도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공부법은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올라가는 것을 공부의 모범으로 삼았다. 공부할 때는 단번에 무언가를 이루고자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이는 ‘공자는 선인들이 크게 이룩한 것을 모은 사람이고, 주자는 현인들이 크게 이룩한 것을 모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아나가며 공부했던 주자를 먼저 공부의 모범으로 삼고 익힌 뒤 공자를 배운다면 선조들이 이룩한 바를 조금은 따라갈 수 있다고 임금인 선조에게 아뢴 적이 있다.
조선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의 공부법은 반복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롯이 책에 몰입하여 읽고 또 읽은 반복공부였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완전히 깨우치기 전에는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세상의 일들에 요동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퇴계는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하는 것을 거울 닦는 것에 비유했다. 매일 거울을 깨끗하게 닦는 사람은 거울 닦는 것이 힘들지 않을뿐더러 항상 깨끗한 거울을 쳐다볼 수 있다. 공부는 이렇게 매일 거울을 닦듯 해야 한다고 퇴계는 말했다.
‘하루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얼굴빛이 달라진다’고 말한 연암 박지원(1737~ 1805)은 실용 공부법이 특징이다. 연암은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이용되거나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학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공과 출세, 재테크 혹은 자기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연암은 달랐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공부보다는 은택이 천하에 미치고 그 공덕이 만세에까지 전해지는 공부를 하라고 말했다. 연암은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았고 출세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처음 과거시험에 응시한 나이가 29세였다. 그 이전에 이미 ‘마장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등을 써놓았다. 연암은 글쓰기에 대해서 “글은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인데 생각을 꾸미고 글자마다 고치려고 애쓴다면 화공을 불러 초상화를 그릴 때 용모를 고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독서가는 백곡 김득신(1604~1684)이다. 그는 명문 사대부가에서 태어났지만 소문난 둔재여서 글도 또래보다 늦게 배웠다. 백곡에겐 남들이 가지지 않은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책을 읽고 또 읽는 끈기였다. 그 덕분에 59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고,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터득하는 기간이 남보다 몇 배 혹은 몇 십 배 더 길었지만 그럼에도 나중에는 높은 경지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청장관 이덕무(1741~1793)는 평생 읽은 책이 2만권이 넘었다. 그의 공부법은 규칙적으로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독특한 것은 똑같은 책을 다섯 번씩 읽는 공부법이었다. 정독한 후에는 반드시 느끼고 깨우친 점을 기록했다. 그는 글 읽은 횟수와 시간을 배정하고 어릴 때부터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배정된 시간을 지켜 정해진 횟수만큼 글을 읽었다고 한다. 더 특이한 사항은 배정된 시간을 넘어 더 읽거나 덜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몸이 아파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가 아니면 절대로 이러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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