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력 짙은 소리꾼 장사익
호소력 짙은 소리꾼 장사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8.22 19:28
  • 호수 3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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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목소리로 아흔 살까지 읊조리듯 노래 부르고 싶어요”

소리꾼 장사익(64)씨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대표곡 ‘찔레꽃’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사’는 없을 것이다. 피를 토하듯 혼을 다해 내는 고음에 감흥 받아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면 속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기분마저 느낀다. 지난 8월 3일 독일 루르공업지대 보쿰시에서 열린 ‘근로자 파독 50주년·한독수교 130주년 기념 가요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대 아래에서, 무대 뒤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백중 전날인 지난 8월 20일, 서울 근교 절을 찾아 스님들을 만나고 왔다는 장씨에게서 독일 공연 에피소드부터 들었다.

-TV로 보니까 많이들 울더라.
“동포들이 마치 울려고 공연장에 온 것 같았어요. 무대 뒤에서 자원봉사 하던 파독광부 출신의 70대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고 해요. 고국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신세가 서러운지 나를 붙잡고 엄청 울었어요. 공연 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힘겨운 노동 장면들을 보면서 울고, 공연 중 수십년 떨어져 살아온 자매가 극적으로 만나는 이벤트 장면에서도 울고 온통 눈물바다였어요. 비가 세차게 오고나면 세상이 깨끗해지듯이 살면서 힘들었던 일, 고생했던 일들을 씻어내려는 ‘씻김의 굿’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독일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어느 파독간호사의 독일인 남편이 내 노래 중에 ‘꽃구경’이 감명 깊었다고 해요. 그 사람이 가사 의미도 모를 텐데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까 역시 노래가 가진 슬프고 애달픈 이미지가 전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공연의 보람도 느꼈어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감동을 받을까.
“노래는 정성이에요. 제가 기를 쓰고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것을 좋게 봐주시는 것이겠지요.”

-1년에 얼마나 공연을 하나.
“100~150회 정도. 한 사람을 위해서도 하고 그러지요.”
-한 사람을 위해서도?
“작년 봄에 투병 중인 70대 지인을 위해 노래를 불렀어요. 그분은 잘 알려진 여류시인이에요. 6인 병실에 누워계신 그 분의 귀에다 ‘장사익이 왔다’고 말하자 제 손을 꼭 잡는 겁니다. 전날 온가족이 임종 전 모습을 보기 위해 다녀갔다고 해요. 가지고 간 편지도 전해주고 내가 해줄 것이 노래라고 생각해 그분 귀에다 대고 ‘봄날은 간다’를 옆 사람이 들리지 않게 자그마한 소리로 불러드렸어요. 노래를 듣고 난 시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다’고 소리를 억, 억 내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 다시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드렸더니 내 손을 붙잡고 힘을 주었어요. 그러고 나서 병원을 나왔어요. 시간이 지나고 그분의 부음을 기다렸는데 웬걸요. 나중에 그분 따님이 전하는데 그날 오후에 어머니가 침대에서 일어나 식사를 했다는 겁니다. 그 시인은 지금도 생존해계세요. 보잘 것 없는 유행가가 중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노래를 한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또 다른 사연도 있다. 몇 해 전 공연을 마치고 청중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장 선생! 난 사인 필요 없어요. 내가 오늘 아침까지 정신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었거든 그런데 오늘 당신 노래 듣고 약 끊을 거야. 40년 동안의 고통이 당신 노래를 듣고 싹 없어졌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살기 힘들고 답답한 요즘 시대에 그의 노래는 힐링이 되고, 우리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다. 어떻게 해서 그런 마력을 발휘하는 걸까. 그는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걸까.

장씨는 충남 광천의 농가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돼지를 길러 내다팔았다. 아버지 몸에서는 늘 구수한 돼지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장구잡이기도 했다. 돼지를 몰면서 장구가락을 쳤다. 그 가락이 아들의 몸에 뱄다. 가난한 시골 생활을 견디다 못해 상경했다. 선린상고 다닐 때 소풍 가서 노래한 이후 주위에서 노래를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노래를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퇴근 후 회사 근처 낙원상가 학원에 나가 노래를 배웠다. 한 곡을 정해 일주일 동안 연습했다. 그때 우리나라 가요는 모두 섭렵했다고 한다. 군대 문선대에서도 노래를 했다. 제대 후 다니던 무역회사에서 해고된 이후 가구점 직원·독서실 주인·카센터 사무장 등 15개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직장을 자주 옮긴 것에 대해 “학벌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다 참을성이 없어서… 그렇지만 꿈은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어느 날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 10가지를 적어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맨 마지막에 쓴 ‘태평소’를 찍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듣던 태평소 소리가 자꾸 머리에서 맴돌았다. 3년간 죽기 살기로 불어보자고 결심했다. 평소 좋아하던 이광수 사물놀이패를 찾아가 사정사정한 끝에 합류했다. 연주 실력이 뛰어나 전주대사습놀이와 전국민속경연대회 등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진가는 사물놀이 끝에 벌어지는 뒤풀이에서 드러났다. ‘봄비’ ‘님은 먼 곳에’ ‘동백아가씨’ 등을 신명나게 불러 재껴 박수를 받았다. 그의 노는 모습을 보던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재능을 발견하고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1994년 11월 어느 날, 신촌의 소극장에서 첫 연주를 가졌다. 그리고 단박에 가요계를 뒤집어놓았다. 그의 나이 45세 때 일이다.

-가장 힘들었을 때 만든 노래가‘찔레꽃’이라고.
“잠실 고층 5단지 살 때 일이었어요. 5월 어느 날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철책 쪽에서 바람에 향기가 실려 왔어요. 장미꽃이 다발로 피었지만 장미 향기는 아니었어요. 자세히 보니까 찔레꽃에서 나는 거더라고요.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 졌어요. 내가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였어요. 아는 사람의 카센터에서 고객 주차를 해주고 있었지요. 숨어서 핀 찔레꽃이 내 신세와 같다는 생각이 들자 서러워서 눈물이 나온 겁니다. 꽃을 보는 순간 어릴 적 기억도 났어요. 봄이면 들판에 핀 찔레꽃을 따먹곤 했어요. 찔레꽃은 회충을 죽인다고 어른들이 말했던 기억도 났어요.”

찔레꽃은 그가 작사·작곡했다. 가사가 처연하다.
(하얀 꽃 찔레꽃/순박한 꽃 찔레꽃/별처럼 슬픈 찔레꽃/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손수 작사·작곡한 노래가 많다.
“찔레꽃이 수록된 첫 음반 ‘하늘 가는 길’ 이후 7집 앨범까지 냈고, 최근에 라이브앨범을 한 장 더해서 총 8장을 냈네요. 앨범 하나에 노래가 9곡 정도 들어가요. 그 중에서 내가 만든 노래가 절반 정도 됩니다.”

-작곡법도 배우지 않았을 텐데.
“무대뽀로 하는 거지요. 내가 만든 노래에 오케스트라가 맞추고 그래요. 옛날에 어머니들이 부르던 민요가 다 구전으로 전해졌어요. 음표를 그려 넣는 건 기술이지요. 그건 절차일 뿐이니까 음표 그리는 사람에게 맡기면 되는 거지요.”

-노래 장르가 독특하다. 국악인 듯하고.
“내 노래는 국악이 바탕이 된 음악이지 올곧은 국악은 아니에요.”

-휴대폰도 없다고 하던데.
“주머니에 무거운 게 들어있으면 질색해요. 지갑도 부담을 느낄 정도니까요. 전철이나 버스 타면 사람들이 다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쉬지 않고 놀리고, 실시간으로 자기가 하는 일을 상대방에게 보내고 그러는 거 보면 내가 딴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져요. 옛날에 시골 살 때 전화가 한두 집밖에 없어서 전화 왔다고 알려주면 달려가서 받고 그랬잖아요. 그래도 불편하지 않게 지냈어요. 고리타분하겠지만 신영복씨가 쓴 글씨 ‘처음처럼’ 때 묻지 않게 있는 그대로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공연 연락은 누가 해주나.
“집사람(고완선)이 다 해줘요. 나 때문에 힘들게 해 미안하지요.”

-공연 수입도 상당할 텐데.
“들어오는 대로 쓰고 빚도 갚고, 있으면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쓰고 그래요.”

-노년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내가 평생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 했어요. 4년 전 환갑 기념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뛰었습니다. 마라톤은 끝까지 뛰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게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완주할 수 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 잘 나가더라도 말년이 안 좋으면 인생 자체가 실패라고 보거든요. 우리 아버지 세대는 80세면 대부분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90세까지 살 거 같아요. 내가 60대 중반이니까 앞으로 살날이 3분의 1이나 남았어요. 새롭게 뭔가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나이에요. 3년 후에는 악기를 하나 잘 다루던가, 외국어를 잘 해야겠다든가 그런 계획을 세워놓고 그걸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내가 한글을 잘 써보겠다고 한 10년을 집중하니까 이제는 남들이 내 글씨를 보고 좋다고들 해요. 디자이너(이상봉)가 자기 의상에 내 글씨를 넣기도 했어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꼭 성공한다는 법은 없지만 하루하루는 보람 있는 삶이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장씨의 글씨체는 파도가 치는 듯 춤추는 듯 개성이 다분하다. 그의 글씨체는 묘비에까지 등장했다. 최근 사망한 방송인 이종환씨 가족의 부탁으로 고인의 묘비명을 써주기도 했다. 그를 수년 전 인터뷰 했을 당시에도 기자에게 가정의 화목과 부부사랑을 기원하는 글씨를 써주었다. 서울 종로구 홍지동 산자락에 걸려있는 그의 집에는 부부의 자필 사인이 새겨진 백년가약서가 걸려 있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를 씁니다. 100년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 조건을 변경합니다’라는 내용이다. 결혼할 때 장씨가 직접 썼다.
장사익은 “난 노래를 하기 전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노래를 하고나서는 얼굴이 펴졌어요”라면서 “앞으로 아흔 살까지 노래를 부를 겁니다. 지금은 힘과 테크닉으로 부르지만 그때는 나만의 노인의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읊조리듯, 씨부렁거리듯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가고 싶어요. 생각만 해도 즐겁네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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