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제강그룹 서원석 회장, 기업 60년, 봉사 60년… 사회적 책임 다하는‘선한 이웃’
성원제강그룹 서원석 회장, 기업 60년, 봉사 60년… 사회적 책임 다하는‘선한 이웃’
  • 김용환 기자
  • 승인 2013.12.06 10:34
  • 호수 3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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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노인회 태국지회 창립총회에 참석키 위해 태국을 방문한 서원석 회장이 부인 이소윤 여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맨손으로 시작해 자산 1조원 규모의 철강 재벌로 ‘우뚝’
평생 근검절약 실천… 자신에겐 ‘엄격’ 이웃에는 ‘후덕’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서혜경 등 다섯 남매 자식농사도 ‘풍년’


지독한 가난을 떨쳐버리려고 전북 김제에서 무작정 상경했던 청년 서원석. 그에게는 세상이 너무 고단하고 슬펐다. 자살을 생각했던 그는 마침 지나가던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보며 저들은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을 했고 못난 자신을 나무랐단다. 그리고는 이 원수 놈의 가난과 싸워 반드시 이기겠다고 맹세했다.
그가 우여곡절 끝에 1953년 성천물산으로 창업, 1979년 상호를 변경한 성원제강그룹은 경북 포항과 충남 당진 두 곳에서 생산한 철강을 국내외에 공급하는 등 계열사를 통해 매년 1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 서 회장이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성원제강그룹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서원석 회장(오른쪽 두 번째)과 부인 이소윤 여사가 이 심 대한노인회장 등 내빈과 함께 케이크를 절단하고 있다.

순탄한 인생이 없듯이 세상에 굴곡 없는 기업도 없다. 서 회장은 영등포공장에서 발생한 대형 인명사고를 비롯해 태풍으로 포항공장을 덮친 산사태, 역삼동 삼원빌딩 신축공사장 지하 붕괴 사고 등 숱한 난관에 부딪쳤지만 이를 모두 극복해냈다고 술회한다.
같이 출발한 회사들이 60년이란 세월 속에 하나 둘씩 모두 사라져갔지만 성원제강그룹이 이처럼 철강업계에서 우뚝 서게 된 데는 은행돈을 빌려 쓰지 않으려는 서 회장의 굳은 결심도 한 몫을 했다.
한창 회사가 성장할 때, 사람들은 남들처럼 회사를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 않는다고 성화였으나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경영을 하기는 싫었다는 것이다.
서 회장의 점심은 주로 자장면 아니면 설렁탕이다. 기업 활동을 하다보면 손님을 자주 만나야 하지만 그때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고 모두 내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나에게 있던 돈이 내일도 모레도 내 주머니에만 있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검소한 생활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즐거운 것”이라는 서 회장.
그는 그동안 수익금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개안수술 지원사업에서 장학사업, 경로복지사업, 효 선양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복지에 크게 공헌해왔다.

▲ 서원석 회장이 대한노인회·현죽효행상 시상식에서 효부에게 시상하고 있다.

또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이기도 한 서원석 회장은 사회복지법인 현죽재단을 설립하고 시각장애인 2000여명에게 개안수술비를 지원함으로써 밝은 빛을 되찾을 수 있도록 했다. 지난 1961년부터 고향에 쌀을 보내는 등 어려운 이웃을 도와 온 그는 회사가 궤도에 오르면서부터는 매년 보릿고개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쌀 300여 가마를 나눠주었고, 모교에 10억원을 쾌척,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도 해 전북 김제시 진봉면에는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 현죽재단이 주최한 청운효자동 경로잔치에서 에벤에셀합창단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서 회장이 이처럼 선한 이웃으로서의 삶을 지속하게 된 데는 할머니 영향이 적지 않다.
“일제 치하에서 보릿고개를 넘는 것은 모두들 힘들었다. 우리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았지만 할머니께서는 찾아 온 걸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며 당신의 밥을 부어주고 냉수를 드시며 끼니를 거르시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러시기 때문에 나도 깡통에 내 밥을 부어주고는 할머니를 따라서 물만 마시고 한 밤을 보낸 적이 적지 않다. 할머니의 그런 교육이 남을 돕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었고, 저절로 몸에 밴 것 같다”는 서 회장은 “나야 조금 좋은 옷 안 입고, 조금 좋은 음식 안 먹으면 어떤가. 사람들이 내가 내미는 손으로 인해 밝게 웃고, 한 사람 얼굴에 근심 한 번 걷어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 서 회장이 기증한 대한노인회 봉사의 탑.

현재 대한노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서원석 회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처럼 노인들이 먼저 봉사에 나서야 한다”며 지금은 고인이 된 안필준 전 대한노인회장과 의기투합, 대한노인회 중앙회 앞마당에 1억원을 들여 ‘봉사의 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전국적으로 600여명의 효행자를 발굴, 시상함으로써 이 땅에 효(孝)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서 회장은 “효행상을 시상하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필리핀에서 우리나라로 시집와서 하반신이 마비된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아모라 파카플라안을 잊을 수가 없다. 이억만리 타국에 와서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는 그 필리핀 며느리를 보면서 민족이 달라도 이렇게 효도를 하는데 우리 모두가 효를 실천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한다. 서 회장은 노인복지에 공헌한 공로로 지난 200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 이소윤 여사와 자녀들.

서 회장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부인 이소윤 여사다. 기업을 일구고, 끊임없는 봉사를 할 수 있게끔 내조해 온 이 여사는 ‘자식농사’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내조의 여왕’인 셈이다.
큰 딸 혜경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며, 둘째 딸 혜림은 동양인 최초로 하버드대학 건축과 교수, 막내딸 혜주는 국제 콩쿠르에서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두 아들 해성, 해봉은 나란히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현재 성원제강그룹에서 아버지의 회사 경영을 돕고 있다.
억척스럽게 자녀 교육에 매달렸던 그녀지만 그동안 자신에 대한 투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캔사스 유니버시티에서 음악치료학을 수료한 후 이화여자대학 등에서 틈틈이 음악치료학을 강의하기도 한 이 여사는 크리스찬문학 신인상과 한맥문학 수필상을 수상한 문인으로 ‘삶은 안단테로 사랑은 비바체로’, ‘코끼리가 연인이 될 때까지’ 등의 저서가 있다.
만원짜리 구두 한 켤레로 만족할 줄 아는 서원석 회장.
“내가 좀 덜 쓰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팁에는 인색하지 않다. 또 누구하고든지 밥을 먹으면 밥값을 먼저 내려고 애쓴다. 돈을 쓰는 재미란 그런 것이다. 내가 돈을 쓰면 다들 즐거워한다. 그런 상대방을 보면 나도 덩달아 기쁘다. 남을 돕는 재미 그것은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한마디로 기쁘다. 즐겁다. 재미있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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