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로 본 조선 후기 선조들의 자유분방한 삶
고문서로 본 조선 후기 선조들의 자유분방한 삶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1.10 11:04
  • 호수 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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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에서 발췌
▲ 박인훤이 작성한 분재기(分財記). 자식에게 재산을 나눠준다는 내용을 담았다.

부인 5명까지 둔 어느 평민… 4명은 다른 남자와 눈 맞아 도망
혼례 절차 없이 손쉽게 첩얻고 거리낌 없이 내치던 풍습 만연


케케묵은 고문서 한 장이 조선 후기 선조들의 자유분방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선 후기 평민과 천민은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다. 당시 고문서 ‘분재기(分財記)’가 이를 증명한다. 분재기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작성하는 문서이다. 이 분재기는 1602년(선조 35) 3월 10일에 박의훤이 자신의 자식 8명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아비가 나이 많은 병자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어서 각자의 몫을 따져서 재산을 허여한다. 또 이와 관련해 다섯 아내 중 네 명이 저지른 죄를 소상히 드러내 기록해두려고 한다. 본처 은화는 남의 남편인 박언건과 몰래 간통해 그에게 시집가 살다가 죽었다.
둘째 아내 진대는 내가 젊은 시절 나를 따라와 살 때에는 나름 강상(유교의 기본 덕목)이 있었지만 후에 사내종과 통간해 죽일 죄에 해당하는 실행을 저질렀다. 소문이 파다해지자 도주해서 영암 땅으로 가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옥천리에 사는 박식을 만나 길에서 상간하고 따라가 지내다가 부처가 함께 죽었다.
셋째 아내이며 나의 아들 박천석의 어미인 몽지는 홍천귀와 몰래 간통해 자식을 많이 낳았는데 홍천귀가 먼저 죽자 따라죽었다.
넷째 아내 가질금은 내가 젊어서 관문에 출입할 때 화간해 아내로 삼은 후 멀리 읍내에서 살도록 했다. 상간할 때 마침 딸을 낳았으나 가질금은 근본이 문란한 여인으로 후에 5, 6명이나 되는 사내와 몰래 간통하며 남편 바꾸기를 제 마음대로 했다. 그러다가 내가 거처하는 마을에 딸을 따라와 살면서 나를 즉시 죽게 해달라고 밤낮으로 하늘에 애타게 빌었다. 이 사실을 나의 족친들은 널리 알고 있다.
박원붕의 어미이자 늙은 내가 오랫동안 데리고 산 다섯째 아내 여배에게 40여년 동안 함께 살면서 마련한 매득전답 11섬지기와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논 1섬지기, 겉보리를 심는 밭 1섬지기 등을 합해 허여한다. 법전에도 부부가 여러 해 동안 함께 살면서 매득한 물건은 똑같이 나누는 것이 통론이며, 아비인 내 몫은 다른 처의 자식들끼리 평균 분급하는 것이 법과 관례에 비추어 마땅하다.

박의훤은 관문에 출입하고 임금의 명령 등을 거론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지방 관아에서 근무한 아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전처들의 비행을 자세히 적은 것은 이유가 있다. 박의훤은 다섯째 부인과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다 어렸다. 자신이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깨달은 박의훤은 어린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재산을 물려준다고 해도 그가 사망한 후 나이 많은 이복형제들이 이를 빼앗아갈 것이 염려되었다. 전처소생들이 재산을 탐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 어미들의 비행을 고의로 과장해서 기록해놓았을 수 있다. 이 분재기를 통해 조선 후기의 평민과 천민들은 지나칠 정도로 성생활이 자유로웠고, 이혼과 재혼을 상상조차 못한 당시의 양반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름빚 갚았다는 사실을 증빙해주소서”
계남면 곡리에 살지만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양사헌이 아룁니다. 삼가 아뢰올 말씀은 제가 평소에 몸가짐을 삼가지 못하고 노름에 빠져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은 것은 이미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노름하다 진 빚 170냥 가운데 50냥은 진즉 이기찬에게 갚았습니다. 나머지 120냥은 간신히 변통하여 분부하신대로 지금 막 관청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뒷날 이 돈을 이기찬이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요구할 것이 염려되오니 논리정연한 판결문을 써주셔서 뒷날 증빙할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탄원서를 제출한 양사헌(1858~ 1888)은 전라도 장수현 계남면 곡리에 살던 양반으로 제출 시기는 을유년(1885, 고종 22) 정월이다. 그가 양반 출신이란 점은 자신을 민(民)이라 칭한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초기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남원 양씨 양형의 후손이다.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노름을 하다 빚을 지고 이를 갚지 못해 옥에 갇혔다. 그의 가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마련해 관아에 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노름 빚 120냥을 관아에 갖다 바쳤기 때문에 그는 곧 풀려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이기찬이 돈을 받지 않았다고 억지를 부리며 소송을 제기할까봐서다. 그래서 양사헌은 지필묵을 마련해 탄원서를 작성, 수령에 제출했다.

▲ 최덕현의 수기. 평민은 도장 대신 손을 그렸다.

“억울하게 요호부민 되지 않도록…”
엎드려 살펴보건대 이번에 고을에서 요호부민을 선발한 데에는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뒤섞여 있어서 그 진위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뽑혔다 해서 모두 돈을 내도록 한다면 어찌 잘못 선정된 억울함이 없겠습니까? 제가 만일 부자로 잘 산다면 모든 사람이 눈과 손으로 지목할 것이니 어찌 거짓으로 가난한 체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공론이 있는 곳에서는 여러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작 10마지기 땅에 의존해서 사는 저를 요호부민으로 선발했으니 지난해 모내기를 하지 못한 채 묵혀둔 논을 팔아 납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주께서는 제 딱한 사정을 살펴보신 후 사실 여부를 조사할 색리를 특별히 파견해 허실을 파악하셔서 제가 억울하게 요호부민으로 선발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탄원서는 전라도 능주목 도림면 쌍봉리에 살던 정진현이 정사년(1857, 철종 8) 2월에 요호부민 선발에 항의하여 관아에 제출한 것이다. 요호부민이란 부호(富戶)라는 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조정에서는 부유한 백성들에게 공명첩(空名帖)을 팔거나 갖가지 명목으로 의연금 등을 거둬 경제적인 어려움을 타개하려 했다. 흉년이 거듭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국가의 재정지출이 늘어나자 아예 고을별로 부호를 선정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이들에게 공명첩을 사게 하거나 쌀이나 돈을 내도록 강요했다. 탄원서를 낸 정진현은 양반이지만 겨우 10마지기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가난한 처지로 억울하게 부호로 선정되어 의연금을 내야만 했다. 그가 의연금을 내려면 지난해 모내기를 하지 못하고 묵혀둔 논을 팔아야 했다. 할 수 없이 수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사실을 조사해 선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수령은 정진현의 사정을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곧바로 붓을 들어 ‘누구를 넣고 빼고 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소송을 제기하지 마라’는 처분을 내렸다.

첩을 얻었다가 두 달만에 버린 남자
조선 영조 대에 경상도 고성현의 서당훈장 구상덕(1706~1761)은 자신의 일기 ‘승총명록’에 그가 첩을 만났다가 헤어지는 과정을 적었다. 구상덕이 첩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자.

3월 6일 화곡 배조이의 방에 가서 잤다.
9일 배조이를 내 집으로 데려왔다.

배조이는 구상덕이 첩으로 맞은 여자로 화곡에 살았다. 구상덕은 배조이를 첩으로 들이면서 혼례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사흘 만에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배조이가 처녀인지 과부인지 알 수 없으나 양반의 서녀였다. 승총명록에는 첩과 헤어지는 과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4월 28일 화곡 배조이의 성품이 사나워서 데리고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녀의 집으로 돌려 보냈다.
29일 화곡인(배조이)이 돌아와서 집에서 내쫓아 밖에 머물게 했다.
5월 1일 내가 친히 화곡인을 데리고 용전 아래까지 가서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어서 허 원장 댁에서 잤다.

구상덕이 배조이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다음날 배조이가 구상덕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배조이의 친정에서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구상덕은 그녀를 내쫓아 집 밖에서 머물게 했다. 이튿날 구상덕은 날이 밝자마자 직접 배조이를 데리고 그녀의 친정에서 아주 가까운 용전까지 바래다주었다. 구상덕으로서는 그녀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이자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었다. 배조이를 처음으로 친정에 돌려보낸 4월 28일에 구상덕은 그녀의 적종형(嫡從兄) 배좌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했다. 배좌수에게 편지를 쓴 건 그가 배씨 집안의 어른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배조이와 함께 살게 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이미 여러 차례 사나운 태도를 보여 제가 저녁에 잠자리에서 조용히 가르치기를 한두 가지 방법으로 해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의 평소 말과 행동이 부모의 얼굴색을 살피면서 봉양하는 도리를 잃은 적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지아비인 제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무슨 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끓는 국을 주어 입 안을 다 헐게 만들었고 창문을 열어 바람이 들이치게 해 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날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낮은 목소리로 이를 말렸더니 그녀는 도리어 큰 목소리로 대꾸하기를 마치 미친개가 날뛰며 사람을 쫓듯이 하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온몸에 돋았습니다.
(중략) 원래는 당연히 즉시 쫓아내야 하지만 혹시 다른 소문으로 귀 가문에 누를 끼칠까 염려해 우선 잠시 노여움을 달래서 더 이상 성토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토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부의 인연이 끊어지는 슬픔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날마다 채찍을 더하여 개전하기를 기약한다면 회합의 길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상덕이 쓴 편지에는 오로지 그만을 믿고 첩살이를 시작했다가 시집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박을 당해 친정으로 돌아간 배조이에 대해 몹시 거칠게 그려져 있다. 첩으로 들어와서 겪었을 여러 고초나 소박을 당하고 친정으로 돌아가 온갖 냉대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의 배려조차 찾아볼 수 없다.

 

편집자 주=위 기사는‘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휴머니스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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