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성주이씨(星州李氏)
[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성주이씨(星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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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3.1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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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벽상도형’ 명문세도 5파 자손번창

백세시대은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는 제하의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가며 충효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기획을 활용해 독자 여러분의 성과 본, 대종회 및 종친회 등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는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게재됩니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로 성주이씨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다음호는 성주 도씨 편입니다.) 

 

고려말 ‘벽상도형’ 명문세도 5파 자손번창


고서에 따르면 신라 건국 이전 진한(辰韓)시대. 지금의 경주 부근에 6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于珍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이다.

   오현재. 성주이씨 중시조(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1443년(세종 25년) 왕명에 따라 태실 자리로 양보하고, 지금의 오현으로 이장했다.

 

신라 건국 설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알 속에서 태어나 이들 6촌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고, 양산촌 촌장인 알평의 도움으로 신라를 개국하게 된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탄생과 왕위등극도 대략 비슷하다.


신라 3대 유리왕에 의해 이들 6촌은 6부로 격상되고 각각 성(姓)을 하사받는다. 즉 양부 이(李), 사량부 최(崔), 본피부 정(鄭), 점량부 손(孫), 한기부 배(裵), 습비부 설(薛) 등 성(姓)씨가 그래서 생겨났다. 이씨의 시조는 혁거세를 신라 개국 시조로 옹립한 양부 양산촌장 알평이다.


그러나 현대 성씨연구자들은 각종 금석문 등을 근거로 7세기 이전(676년에 삼국통일이 됐다)에는 성씨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성씨는 신라 후기에 수입된 중국의 문화였으며 왕으로부터 귀족, 양민의 순으로 전파됐다는 것.

 

그리고 성씨와 본관 개념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태조가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시행한 ‘토성분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방의 호족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인질을 중앙에 진출하게 하여 관향을 삼도록 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서 깊은 명문 성씨들의 시조가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인물로 집중되고 있다.


성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조에서 이부상서를 지낸 재상공 이순유(李純由)다. 신라 말 경순왕이 고려태조에 항복한 뒤 신라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읍 경산리로 들어가 은둔했다.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에 역대 성주이씨 현조(顯祖)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이다. 영정 10현조 13폭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있고,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됐다.

 

그 뒤 고려 원종(1260~1274)조에 이르러 시조 이순유의 11대손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들이 크게 출사하게 된다. 장자인 밀직사사(密直司事) 백년(百年), 이남 참지정사(參知政事) 천년(千年), 삼남 문하시중(門下侍中) 만년(萬年), 사남 개성유수(開城留守) 억년(億年), 오남 정당문학 문열공(政堂文學 文烈公) 조년(兆年) 등이 그들이다.


아들 5명이 모두 나라에 크게 공헌하여 아버지 이장경은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承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특히 손자(천년의 아들) 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요양성(遼陽省) 참지정사까지 오르게 되어 그 조부인 이장경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 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후대 8世 이내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에 달할 정도로 후손들이 크게 일어난다. 성주이씨는 고려말에서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유서 깊은 가문답게 그중 현조(顯祖) 22위를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안산서원에 모시고 지금까지도 배향하고 있다. 배향하는 인물은 중시조 이장경으로부터 조선 숙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은암 이광적(1628~1717)까지 모두 22위.

 

여기 모신 10위의 영정 13폭은 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또 영당(影堂)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217호로 지정되어 성주이씨가 1100여년이 넘는 유구한 가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관직에 나간 성주이씨 후손들 중에 전국 각지의 임지에서 정착하는 경우도 많아 성주 외에도 경기, 충청, 강원, 호남권까지 전국적으로 성주이씨 집성촌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임지에서 본관지로 돌아온 후손들이 상당수여서 중시조 이래 지금까지 명문가 본관지로서의 전통과 족보·서원·사당·묘소 등 사적들이 성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국 종친 800여명이 지난해 음력 10월 1일 오현제 시조공 제단비 앞에서 열린 시향제에서 참례하고 있다.


그런데 성주이씨 중에 뛰어난 인물이 많고 자손이 번성하여 본관지 성주에서 분파해 다르게 칭관하는 경우도 있다. 농서이씨가 그들이다.

 

그리고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성주이씨 인물검색을 해보면 본관이 성주인 이씨 인물들 사이에 본관을 벽진(성주군 벽진면)이라고 쓰는 인물들이 간혹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도 성주이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이승경의 증손자인 이영(李英)을 시조로 받들고 있는데 그 5대 후손이 이여송이다.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철령(鐵嶺)에 비를 세우기도 했으며 그들은 현재 철령이씨라 한다.

 

 

낱장 서문만 남은 국내 최초의 족보

권씨 성화보와 유씨 가정보에 이은 세번째 족보
1968년 종친회 창립, 1질 9권 을묘대동보 발간

성주이씨의 족보는 1464년(세조 10년)에 최초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꼽히는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12년이나 앞서 발간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윤손(李尹孫)의 농서이씨보에 서문만 전하고 있다.


그뒤 1613년(광해 5년)에 계축보(癸丑譜)를 간행했다. 단권 목각본이었으며,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유씨 가정보(1562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족보다. 그리고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활자본을 속속 간행했다.

 

1751년(영조27년) 7권 6책의 활자본 신미보(辛未譜)을 비롯하여 1830년(순조 30년) 21권의 활자본 경인보(庚寅譜), 일제시대인 1924년의 활자본 27권 갑자보(甲子譜)까지 족보를 간행하여 성주이씨의 역사를 기록했다.

 

현대에 와서는 1968년 성주이씨 전국종친회(대종회 전신)가 창립되면서 1질 9권의 현대활자 인쇄본 을묘대동보(乙卯 大同譜)를 발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밀직공파 등 수많은 중간 지파종회별 족보는 생략)



 

성주이씨 인구분포

이씨 중 세번째 규모, 18만 6188명


영남 47.3%, 충청과 호남 14% 차지


국내 성주이씨의 분포도를 보면(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본관별 인구통계) 전체 인구 18만 6188 중에서 영남권이 8만 8145명으로 47.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 연고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충청과 호남권에도 성주이씨가 2만 6075명(14%)으로 구석구석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에도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서울과 경기도의 인구는 이농현상 후에 전국의 성주이씨들이 모인 결과여서 인구분포 통계로서 큰 의미가 없다.




 

역사속의 성주이씨 인물

조선중기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 배출
李兆年·李崇仁·李 稷·李如松 등 다수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말 재상으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뒤 마의태자와 함께 구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로 숨어들었다.

 

이후 고려 초기까지 숨어 지내다가 중후기에 출사하면서 고려시대를 풍미하는 권문세족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려 말 조정에 출사한 친원(親元) 그룹에 속해 친명세력인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실각하여 성주로 대부분 안치되고 일부는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공신도 있으나 조정 출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에 다시 크게 일어나고 말기에 이르면서 그 기세가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조선중기(15세기부터 17세기)에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을 배출한 영남권의 30여 성·본의 하나로 꼽힐만큼 명문이다.


주요인물로는 ‘이화조’를 지은 이조년, 고려의 삼은으로 꼽히는 도은 이숭인, 영의정을 지낸 이직, 중국의 장군 이여송 등 다수가 있다.

 

성주이씨의 인물에 대한 세세한 사항은 세진록을 참고하면 알수 있다. 여기서는 이름만 소개한다.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이인기, 이여경, 이승경, 이태보, 이태성, 이포, 이원구, 이영, 이득방,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민, 이비, 이환, 이존성, 이숭인, 이제, 이발, 이직, 이수, 이사후, 이견기, 이사형, 이숭문, 이지원, 이영분, 이혼, 이문흥, 이정녕, 이지활, 이집, 이의, 이전, 이문재, 이자상, 이자견, 이자건, 이운거, 이지번, 이윤탁, 이자화, 이충건, 이성량, 이창, 이성, 이문건, 이항, 이언충, 이조, 이담, 이산우, 이여송, 이원배, 이일장, 이현배, 이구, 이덕응, 이휘, 이현배, 이준구, 이광적, 이지선, 이응협, 이택징, 이종일.


현대의 성주이씨 인물

국회의원·장차관·판검사·박사 등 많아
독립운동가·학자 등 비관직에서도 인물

조선후기부터 조정에 출사하는 인물이 감소하여 의사(義士), 독립운동가, 학자 등 비 관직에서 인물이 나온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정계, 군, 판검사, 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이 배출된다.


성주이씨의 현대인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 그 외에 국회의원 장차관, 군장성, 판검사,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인물이 배출된다.


<성씨총감>에 수록된 박사 수는 헬 수 없이 많다. 경제계에서는 신영그룹 이운일, 세방그룹 이의순등 준재벌급 인사도 포진하고 있고, 한국잡지협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주택신문과 현대주택 발행인 이심회장을 비롯한 언론·출판계 인사도 다수 있다.


이순자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 이병희 국회의원(15대까지 7선), 무임소 장관/ 이용택 국회의원(11,12대) / 이학봉 국회의원(13대) / 이종률 국회의원(10,12대) / 이대순 국회의원(11,12대), 체신부장관 / 이상용(강원도지사, 노동부장관) / 이동근 국회의원(13,14대) / 이해봉 대구종친회장 국회의원(15,16,17대) / 이재선 국회의원(15,16대) / 이문석 육군대장, 총무처장관 / 이기주 경남 도지사 / 이규동 육군준장(작고) / 이희근 공군대장 / 이소동 육군대장 / 이태섭 육군소장/ 이종학 육군준장 / 이규광 육군소장 / 이상태 육군중장 / 이해순 핀란드대사(작고) / 이산석 전주교육대학장 / 이정한 경상대학교총장 / 이상만 서울대학교수 / 이명섭 변호사, 농서장학회이사장 / 이중근 서울지검검사장, 청와대법무비서관 / 이재훈 성남지법원장, 변호사 / 이광열 청주지원장, 서부지원장 / 이만희 서울고검부장판사 / 이창민 국민가수(예명 백년설) / 이석용 대한손해보험협회장.

■ 인터뷰 / 성주이씨 대종회 이시욱 회장

鳳山齋(봉산재) 성역화 삼현소 중건 마무리 온 힘

화합행사 ‘선현들의 발자취’ 일깨워
검·판사 50여명 예비 재벌급 인물 많아

이시욱 대종회장은 1934년생으로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에서 출생했다. 성주이씨 맏집인 백파(밀직공파)이며, 철강회사를 창립하여 경영하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대종회장과 국제라이온스클럽 등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신촌의 성주이씨 대종회 사옥에서 이시욱 회장을 만나 성주이씨 대종회에 대해 들어보았다. 성주이씨 대종회사무실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걸출한 분들이 사랑방처럼 이용하고 있어 이날도 대종회 고문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이소동장군이 인터뷰에 합석했다.


성주이씨 지파종회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한다면 

▶중시조인 농서군공 할아버지께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등 다섯 분 자제가 있는데 모두 크게 출사하신 분들이다.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등 5파로 나뉜다. 성주이씨 종친회는 이 5파별로 운영되고 대종회가 이 5파를 통합 관리한다.

 

또 16개 광역시도별로 성주이씨 종친회도 대종회가 관리한다.

대종회가 수행하는 사업은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는 이 삼현소를 유지 관리한다. 제례나 시향 행사를 관장하고 유물 유적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사업도 대종회가 맡고 있다.

 

특히 중시조 묘소가 있는 오현재와 안산서원에서는 해마다 정기총회, 한식재, 시향 등 대단위 종사를 거행한다. 사람도 많이 모인다. 큰 시향 같은 경우에는 오현재 주차장이 버스로 꽉 찬다. 1000~2000명 정도가 모인다. 대종회 전국 대의원 수는 400여 명에 이른다.

그래도 말이 많고 분란이 잦은 것이 종친회인데 

▶그런 면이 있다. 우리도 내 전임 때 1년 이상 대종회가 마비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단합이 깨지고 지파종회에서 불만들이 표출됐다. 다행히 내가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지금과 같이 단합하는 전통을 복원했다.

대종회장님이 리더십이 있는 것 같다.

▶글쎄…. 원래 남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는 데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 그런 게 바탕이 돼 한국라이온스클럽은 물론 국제라이온스클럽 아시아지역 TOP에 오르기도 했다. 그것이 리더십이라면 리더십일 것이다. 어쨌든 대종회 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더십이라기 보다 대종회 임원들이 단합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주이씨 대종회를 운영하는 철학이 있다면 

▶종친회 성원은 전부 혈족이다. 그러다 보니 생산적인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연로한 분들이 이끌어가지만 현대적인 흐름에 맞게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중 행사할 때 재미있게, 예를 들어 야유회를 하듯이 가족소풍을 하듯이 참여할 수 있게 이벤트도 마련하고 선물도 들려주며 선현들의 자취를 알게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sungjulee.co.kr/)를 꾸민 것도 그 일환이다.

역사인물도 많고 현대에는 4성 장군도 많고, 집안으로 보면 대통령 사위도 보았는데…

▶격동기에는 많은 일이 있다. 누구든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이순자 여사와 5공화국의 일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국가 중흥기에 큰 업적을 남기신 것으로 우리 문중에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순자 여사는 성주이씨 5파 중 맏집인 밀직공파의 후손이지만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살았다. 물론 그 부모대 삼형제(이규광, 이규동, 이규성)가 모두 군에서 높이 올랐다.

 대종회 사무실에서 종친회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이문순 사무처 장, 이원섭 서울종친회장, 이시욱 대종회장, 이소동 고문, 이도필 대종보편집위원장.

 

성주이씨가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는가 
▶고르게 분포한다. 4성장군이 5명이나 되고, 고급관료와 정치인도 있지만 검판사가 50여명에 이르고 경제계에도 예비재벌급 인물들이 많이 있다. 모두 애종심이 강해서 명망과 지위에 구애됨이 없이 종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대종회와 지파종회, 지역종친회 임원들도 모두 훌륭한 분들이다.

앞으로 성주이씨 종사에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곧 이사회가 있다. 성주이씨 20년 현안사업인 봉산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확정지을 것이다. 이것을 하면 비로소 삼현소가 모두 중건된다. 금년에 착공을 해 놓으면 내년에 내 임기가 끝난 뒤에도 후임이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특집팀

박병로 편집국장
최종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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