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광산탁씨(光山卓氏)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광산탁씨(光山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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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4.0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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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光山) 본관 7개 성받이 중 으뜸 자부하는 명문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되며 본지 60호 ‘한국 성씨·본관 총괄 기획특집 기사에 이어 성주이씨(61호), 합천이씨(62호)를 게재했고 이번에는 네 번째로 광산탁씨(光山卓氏)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박병로 편집국장

 

광산탁씨는 중국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문헌(서하징음사기;西河徵音史記)에 처음 등장한 이름은 탁무로 광무제(후한의 초대 황제; 기원전 6~57년)에 의해 보덕후로 봉해진 사람이다. 당나라 문헌에는 호부상서를 지낸 탁득경, 학자인 탁위·탁종·탁유, 시인인 탁운·탁자신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탁씨 성을 가진 인물은 고려 경종(976~981) 때의 탁사정(卓思正)으로 추정된다. 당나라가 망한 해가 909년, 신라가 문을 닫은 해가 932년이므로 탁사정의 선대가 오래 전에 한반도에 들어와 신라인, 혹은 고려인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탁사정은 현종 2년(1011년)에 어사대 중승이 됐으나 강조(康兆:목종을 시해하고 거란과의 싸움에서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의 무리였다는 이유로 해도로 유배되어 은거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탁씨가 광산 단본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탁사정은 광산탁씨 시조의 조상이 되는 인물인 듯하다.

 

광산탁씨 대종회보에도 ‘탁사정공’으로 표현하며 시조 이전의 연원을 추정하고 있다.

 

탁사정으로부터 시조 탁지엽이 등장하기까지 90여년 동안은 공백으로 있는데, 이는 유배됐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광산탁씨의 시조 학포(學圃) 탁지엽(卓之葉)은 젊어서 문정공 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문이 높은 인물이었다. 고려 선종조(1083-1094년)에 한림학사로 제수되고, 주요직을 거쳐 태사에 이르렀으며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이에 따라 그 후손들이 광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여기서의 문정공 김선생은 광산김씨로 추정된다. 그런데 광산김씨의 문정공은 광산김씨 15세손으로 문정공파조로 탁지엽보다 200여년 후대인 1200년대에 활동했다.

 

탁지엽과 앞선 세대로 활약했던 광산김씨 인물은 6세손인 김양감, 7세손인 김정준이며, 이들은 모두 조정에 출사하고 있었다.


탁재용 광산탁씨 대종회장은 “광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탁씨, 노씨, 이씨, 김씨, 정씨, 반씨, 승씨 등 7개 성받이 중에서 탁씨가 으뜸이었다는 얘기를 어려서부터 들었습니다”며 “인구는 적지만 명문이라고 자부합니다”라고 했다.

 

 

노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광산노씨이고, 광산김씨는 단일본관으로 인구수도 많고 고려조와 조선조에서 많은 인재들이 등용된 명문가로 꼽히는데 ‘탁노리김정반승’이라는 식으로 탁씨를 가장 먼저 꼽아왔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을 설득력이 있게 하는 인물은 공민왕 조의 문정공 탁광무다.

 

그 생몰년도는 불분명하지만 내서사인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문집으로 겸영정집(景濂亭集)이 있는데, 동시대에 활약했던 이름있는 문장가와 세도가들이 그의 문명을 칭송하는 글과 교분을 나누는 증거들이 수록돼 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제경염정오절(題景濂亭五絶)로 익재 이재현,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초은 이인복, 삼봉 정도전 등이 차례로 오언절구의 시를 지었다.

 

모두 경염정 탁광무와 저자에 대해 한가락씩 문장을 자랑하고 있다. 탁광무 사후에 지인들이 쓴 만장도 문집에 수록됐는데 황보인, 하연, 정분, 김종서, 김질, 박원형, 정갑손, 김덕룡, 최응룡, 하위지 등이 문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탁광무에 아들 죽정공 탁신(卓愼: 1367~1426년)도 광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받이들 중에서 광산탁씨를 두드러지게 하는 인물. 조선 태종 때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세종때에는 의정부참찬에 이르렀다. 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무예 ·음률(音律)에도 능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에도 역시 이름이 있는 세도가 문장가들이 그와 주고받은 글을 남기거나 그를 추억하는 글이 수록돼 있다. 여러 문사들의 글 중 대표적인 것이 김종직의 ‘벗 죽림정에게 주다(題卓友竹林亭)’와 송시열의 ‘죽정공 옛집을 지나는 느낌을 쓰다(過竹亭舊居有感)’이다.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에 의하면 탁광무가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으로써 아들 죽정공 탁신과 15세손인 탁순창, 20세손 탁길 등 종계가 오늘날의 안동파로 이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대종회보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훈련대장을 했던 탁순창이 처가가 있는 안동으로 와 터를 잡고 죽정공을 배향하는 세덕사를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죽정공 탁신의 묘가 광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탁순창 때부터 안동에서 세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반해 북한쪽의 뿌리는 12세손 탁연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높은 벼슬에 있다가 정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손들이 영변, 박천, 영흥 등지로 세거지를 넓혀간다.

 

 

그리고 안동파의 한 후손인 탁세공이 익산으로 가서 익산파가 되고, 역시 16세손인 탁세연이 순천으로 이거하며 광양파가 된다. 그리고 17세, 19세, 20세, 21세손이 강원도 양양, 강릉, 충주, 가평 등 여러 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대에서 이와 같이 전국으로 세거지(집성촌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가 분파해 가는 것은 고려조에서 조선초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세도와 문명에 비해 한미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편찬한 족보 서문에 그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족보를 편찬하면서 후손들이 학덕이 높은 인물을 찾아가 서문을 부탁하면 전통의 명문가인 탁씨의 후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선조 34년(1600년)에 백곡 정곤수가 쓴 광산탁씨 족보에 “정말 슬픈 일이로다. 세대가 차츰 멀어지고 병화를 여러 번 겪어 비록 징빙할만한 문헌이 없다고는 하지만 내 어찌 춘추의 필법을 본받지 않을손가”라는 기록이 있다.

 

또 1839년(헌종 5년) 대사헌 이노병이 쓴 서문에는 “극도로 쇠미한 운수 속에서 유협이 나온 것도 어쩌면 산이 웅장하면 봉우리가 빼어나고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이 깨끗하다는 이치일 것이다. 유협 등이 여러 사람들의 믿을만한 글과 당시 사람들이 남긴 문자를 수집하여 몇 편의 책을 만들어서 나에게 보이면서 서문을 요청한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인구수 2만 명에 채 미치지 못하는 광산탁씨의 위상은 웬만한 명문가에 비할 만하다. 국난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난 의병장이 있고, 과거급제도 상당수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순국한독립투사도 있다.


족보와 문집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장수하는 집안인 듯하다. 시조 탁지엽이 90세, 8세 탁광무 81세, 그 아들 탁신이 60세 등 다수가 70세 정도로 장수했다.

 


 

최초 ‘정미보’ 이후 12차 족보 발간


광산탁씨 족보


광산탁씨 문중의 가장 오래된 족보는 1600년(선조 34년)에 간행된 경자보다. 본문은 현존하지 않지만, 백곡 정곤수가 쓴 족보의 서문이 남아 있다. 경자보는 15세손인 탁순창의 아들 세영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 족보 역사로 볼 때 대단히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집에도 족보라 할 수 있는 세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8세손인 탁광무의 글을 모아 편찬한 <겸영정집(景濂亭集)> 권5 <부죽림정집(附竹林亭集)>편은 광산탁씨 시조 탁지엽부터 24세까지의 세계를 담고 있다.

 

겸영정집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의 당대 최고의 석학 문장가들의 글이 실려 있는 문집으로 한문학사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서문만 전하는 또 하나의 족보가 있다. 16세손인 탁세형이 진행한 <광산탁씨세보사실>이라는 책의 권두에 실린 한산이상정의 ‘기해보서(己亥譜序)’가 그것.

 

역시 기해보는 전하지 않는데, 추정하기로는 1779년(기해년)일 것으로 보인다. 탁세형이 진행하던 원고를 100여년 뒤의 후손이 다시 작업을 하여 이상정에게 서문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정은 1779년 당시 활동하던 인물.


그러나 실존하는 광산탁씨 서문은 1907년에 통영의 탁진남이 발간한 정미보가 최초의 것이다. 그 후부터 12차 족보가 발간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 양양 익산 안동 통영 등 집성촌 건재

 

광산탁씨의 인구분포


성씨·본관은 의례 각지파로 분화가 된다. 그런데 광산탁씨는 시호를 받거나 봉군된 인물을 중심으로 한 파분류를 하지 않고 세거지를 중심으로 파를 분류하고 있다.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간)>에는 정주, 곽산, 박천, 영변, 가산, 안동, 함평, 영광, 순창, 가평, 홍천, 거진, 여주, 양양, 강릉, 영천, 창원, 개성, 용인, 충주, 거창, 통영, 사천, 삼천포, 성주 등으로 구분된 파명록이 올라 있다.

 

하지만 ‘2000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옛날의 세거지 중심의 지파가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후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대가 분화하며 세거지 또한 바뀌었던 것 같다.


2000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광산탁씨는 1만 5691명. 강원도와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 옛날의 세거지로 거명되었던 주요 지역의 인구는 여전하기도 하지만 그 절반 정도의 세거지파는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강원도는 강릉, 양양 등지에 인구가 많으며, 속초와 고성에도 광산탁씨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속초와 고성은 정주 부근에서 내려온 실향민 광산탁씨가 아닐까 싶다. 전라북도의 경우도 대부분 유명무실해졌으나 익산지역에 많은 광산탁씨가 분포하고 있고, 전라남도 광양과 영광 등지에서 아직 광산탁씨가 건재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한미하다.


경상남도는 광산탁씨 인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지만 통영, 남해, 사천, 진주 창원 등 일부만이 세거지였음을 알 수 있고 대부분 인구가 희박하다.


대도시가 있는 수도권 광역시는 도시에 인구가 집중하는 현상에 따른 분포로 광산탁씨 인구분포를 보는 지표로서는 통계학적 의미가 별로 없다.

 


 

8세손 卓光茂 9세 卓愼 급제 요직역임

광산탁씨 역사인물

광산탁씨를 빛낸 첫 인물은 8세손인 탁광무를 꼽을 수 있다. 성리학이 들어와 정착하게 되는 고려의 인물로 당대 제일로 꼽히는 이색, 이재현, 정도전, 이숭인, 정몽주 등 숱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었다.

 

9세 탁신은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며 은거했다. 그러다 태조 4년에 출사하여 태종, 세종조 때까지 주요직을 역임했다.

 

김종직 송시열도 그 학문을 높이 인정해주었던 거유로 시호를 문정이라고 했다. 안동의 세덕사에서 그를 배향하고 있다.


조선조 때에는 비교적 한미해지지만 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고, 선조 때 훈련대장을 한 탁순창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진사, 무과에 급제한 인물도 많아 인구수에 비해 화려하다.

 

또 의병으로 일어나 명장 칭호를 들은 탁연도 있다. 충무공전서에 의하면 아우 석, 원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이순신 장군이 있는 한산영 산하 당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통영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돼 있다.


그 외에 박천파의 상계 인물인 탁평, 이조좌랑을 지낸 익산파의 탁세공 등의 인물이 있다.
광산탁씨의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고려조
탁도민(좌정승대제학), 탁원광(선종부마 참지정사), 탁사정(판도판서), 탁종성(대제학), 탁영(평장사).

조선조
탁신(참찬, 문정공), 탁성(한성부윤), 탁연(의병장), 탁재윤(추밀원의관), 탁천성(한성부윤), 탁문위(대제학), 탁온(도승지), 탁순도(황주목사), 탁연(참찬), 탁자견(동지중추부사),탁세형(사간), 탁용(공조참의), 탁미립(훈련원 판관), 탁중보(공조참판), 탁한성(승정원 도승지), 탁세복(훈련원 승지), 탁원립(근위장군), 탁만수(형조참판), 탁창한(공조참판), 탁상옥(형조참판), 탁하귀(공조참의), 탁성택(동지중추부사), 탁지엽(근위장군), 탁순택(한성판윤).


등과 및 음관

조선시대 등과 인물
탁신. 탁성(참의), 탁중(이참), 탁관, 탁석행, 탁운한(병조참판춘추관사), 탁종술, 탁경수, 탁장호.


음관(蔭官)
탁광무, 탁신, 탁희립, 탁중, 탁관, 탁광수, 탁문상, 탁순창, 탁세공, 탁상, 탁임조, 탁영현, 탁기환, 탁세웅(부사).(<성씨의 고향>에서 명단 간추려 발췌)



독립투사 탁공규 선생 등 정재계 다수 진출

광산탁씨 현대인물

근현대의 인물로 맨 앞에 올리는 인물은 안중근의사의 하얼삔 의거 당시 함께 했던 독립투사 탁공규 선생이다.


의거 당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작고하거나 현존한 탁씨인물들로는 초대 광산탁씨 종친회장인 탁시근 도루코회장을 비롯하여 탁나현(전 대사), 탁영진(국회 전문위원), 탁인상(변호사), 탁희준(경제학박사 전 성균관대 교수), 탁재용 대종회장 등이 있다.

(지면 관계상 그 외 인명은 생략함)

 


 

조상 숭모 유대강화로 사업 활성화

■인터뷰 - 광산탁씨 탁 재 용 대종회장

탁재용 광산탁씨 대종회장은 1936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했다. 국방부 직할부대장 및 조달본부 감사실장(대령) 등을 역임하고 전역하여 흥안실업(주) 등 기업을 경영하고 있으며, 광산탁씨 대종회장을 비롯하여 한국직능단체총연합회장, (사)한국인간개발연구회 부회장, 한미우호협의회 부회장, 밝은 가정협의회 이사장 등 다방면의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공로표창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소재 흥안실업(주)회장실에서 탁재용 대종회장을 만났다.

광산 탁씨는 희성에 속한다. 인구가 2만여명 정도. 그런데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한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이북지역에 집성촌이 있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 크게 번성했던 성씨라고는 해도 궁금하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광산탁씨가 다수 분포하는 것이 특이하다.


“우리 탁씨는 고려 중엽, 중국에서 넘어왔습니다. 시조가 광산에 터를 잡고 세거하셨는데 광산을 본관지로 하는 노대통령의 광산노씨, 광산김씨 등 광산의 7개 성받이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성받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조의 어느 임금님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임금님의 이름 끝 자가 탁(卓)이라는 이유로 우리 성씨를 모두 없애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꾸고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탁재용 대종회장의 말이다. 조선조 임금의 위세가 하늘같았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금시초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건 아니건 광산탁씨가 전국의 특정 지역에서 집성촌을 이루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진주 출신이신데 광산탁씨가 어떻게 거기까지 흘러갔을까요 
“임진왜란 때 훈련대장을 역임하신 조상이 안동에 자리를 잡으셨는데, 거기서 하동, 진주, 삼천포, 통영 등지로 퍼져갔습니다.”

◆전국적으로 흩어져 지역간, 파종회간 유대관계 형성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숫자가 적고 단본이기 때문에 파종회 의식이 옅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파든 만나면 우선 반갑고 집안, 친척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파종회장이나 지역 종친회장들과는 유대관계가 잘 되십니까 
“특별이 연합 모임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본이기 때문이지요.”

◆대종회장에 대한 기대가 클 것 같습니다. 어떻게 대종회장이 되셨는지요 
“우리 대종회는 1987년에 발족했습니다. 돌아가신 탁시근 회장(도루코 창업자)이 한 십여년을 맡으셨는데, 내 사무실까지 몸소 오셔서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것이 오늘까지 왔습니다.”

◆예비역 대령의 리더십을 높이 샀을 것 같습니다. 시조 묘를 잘 모시고 종회원들이 애종심을 갖도록 많은 사업을 벌이는 일에는 아무래도 리더십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기는 한데 전임인 탁시근 회장님 때처럼 활성화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조묘를 모시고 시제를 지내는 등 종친회 본연의 사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종손이나 항렬, 세손의 구분은 엄격하신가요  멀리 떨어진 혈족의 모임이니….
“저는 나이를 중시하자고 합니다. 항렬이 낮아도 나이가 많으면 대접해 주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종회라면 지금 세대에 맞게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본관지인 광산에는 아직도 옛 유허지가 보전되고 있습니까 
“아쉽게도 도시개발 과정에 우리 시조인 지자엽자 할아버지 묘소를 옮겨 묘셨습니다. 이때 흩어져 계시던 다른 조상님들도 함께 모셨습니다. 탁시근 전임회장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직 종중의 논밭이 있고, 8대조 묘역이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만, 시조 묘를 옮긴 것은 아쉽습니다. 우리 땅을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는데 군부대가 철수하면 확보할 계획입니다.”

◆시제 같은 종중 행사에는 어느 정도의 종회원들이 모입니까 
“매년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시제를 지내는데 전국에서 평균 200~300명 정도 모입니다. 각 파종회별로 지내는 시제는 해당 지역별로 10월에 지내고 있습니다.”

◆종친회에서 특별히 하고 있는 사업이 있습니까 
“탁시건 회장님이 하실 때 여러 가지로 활발했습니다. 장학사업은 후손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내가 맡은 뒤부터는 그때에 비해 침체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애종심을 갖도록 저 나름대로는, 예를 들어 먼 지방에서 무슨 경사스런 일이 있거나 하면 전화도 하고 식사도 대접하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종회원들도 좀 더 애종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대종회장으로서나 개인적으로 갖고 계신 지론이 있으시다면 
“제가 항시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저는 군대생활을 27년 했습니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20년 했습니다. 군에서 나와 이십년 동안 배웠다고 하면 앞으로 10년은 배운 것을 토대로 내 기업은 물론이고 인생을 보다 성숙하게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사회에도 도움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광산탁씨 대종회장으로써 조상을 숭모하고 대종회의 화합과 유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사업을 벌여갈 것입니다.

◆앞으로의 과제나 특별히 세운 계획이 있는지요 
“마음 아픈 것이 현대에 와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장관 국회의원 등은 물론이고 경제, 문화, 학계 등 다방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다수 나왔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종회장으로서 저도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종친회문화를 새롭게 조성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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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민 2013-09-06 21:00:19
부모님으로 부터 확실한 의견을 듣지 못해 선조묘소 주소지도 모르고 벌초 하려 다녔읍니다 산양면에 열상 정도 있읍니다 고조부님은 바닷가 어장이 있는 언덕 위에있읍니다 그옆에 작년에 폔셴이 하나 들었읍니다 주소를 몰라 이렇게 올려 봄니다 전화번호 010_7298_8326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