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진주류씨(晋州柳氏)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진주류씨(晋州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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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4.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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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에 뛰어난 많은 인재 배출, ‘소수정예’ 명문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되며 본지 60호 ‘한국 성씨·본관 총괄 기획특집 기사에 이어 성주이씨(61호), 합천이씨(62호), 서림·서천이씨(63호), 광산탁씨(64호)를 게재했고 이번 호에는 진주류씨(晋州柳氏)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박병로 편집국장>


‘한국성씨총감’에 의하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류(柳)씨 인물은 적어도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목종 때 평장사를 지낸 전주인 류방헌(柳邦憲)의 묘비문에 그의 증조부가 신라 말의 각간 벼슬을 했으며, 조부가 백제 우장군(右將軍)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사서에 918년 염주(연안)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호족 류긍순이 궁예에게 귀순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진주류씨의 비조는 앞선 두 사람의 류씨보다 기록 면에서는 후대이지만 그 자취가 좀 더 뚜렷하다. 고려 개국에 있어 큰 공을 세우고 대승(大丞)에 오른 삼한공신 문화인 류차달(柳車達)로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 사서에 나타난다. 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어 군량을 공급하여 큰 공을 세웠던 인물.

 

  경기도 향토문화유적지로 단장된 진주류씨 선영.


그런데 진주류씨 비조의 이름자 차달(車達)이 눈길을 끈다.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었다’는 말의 뜻과 이름자가 완전히 똑같다. 이름자에 그가 세운 공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 추측이 가능한데, 당시 기준으로 대단히 앞선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수레를 제공하고 그 공을 인정받을 정도라면 왕건의 세력권 안에서 상당히 부유한 실력자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의 고려 건국 과정에서 그런 활동을 했으므로 류차달의 조상이 후삼국은 물론 신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다.


진주류씨의 중시조, 즉 관조(貫祖)는 류차달의 9세손인 판시사공(判寺事) 류인비(柳仁庇)다. 비조 류차달의 6세손인 정당문학 류공권, 류공권의 아들 상장군 류언침, 류언침의 아들 밀직사 류 순의 막내(季子) 아들이다. 류인비는 비조 류차달로부터 9세손이 되며 벼슬이 판시사 제학이며 상호군으로 치사했다.


류인비가 관향을 진주로 쓴 것은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종회의 입장이다. 문화류문의 영락보(1423년), 가정보(1565년)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보고 있다.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얽힌다. 즉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류씨가 또 있다. 본 지면에서 보는 진주류씨는 이류-문화류씨계(移柳- 文化柳氏系)로 이른바 토류(土柳)계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토류계와 관계나 연원도 복잡하여 이 부분은 아직 미싱링크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 가지 참고할 사항이 있다. 본관지인 진주에 진주류씨의 세거지는 물론 집성촌도 없다는 사실이다. 진주류씨의 유래를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 어느 성씨든 그 본관지가 되는 곳에는 집성촌을 이룬 세거지가 있게 마련인데 그게 없는 것이다.

 

진주류씨가 시대적으로 크게 앞서 생겨난 본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아한 일이다. 그보다는 문화류씨의 발원지가 되는 황해도 신천을 비롯한 고려의 심장부를 중심으로 세거하다 점차 외곽지역으로 퍼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류인비의 할아버지인 류언침이  먼저 진주를 봉작으로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 진주에 가서 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너무 멀어서 관리가 소홀했던 그 봉작지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손자 중에서 가장 막내(季子)인 류인비가 떠맡은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어느 한 시기 잠시 진주에 가 있다가 다시 벼슬을 얻어 상경종사했을 수도 있다. 진주에 그러한 연고가 있어 류인비가 진산군으로 봉군되었다고 보아야 아귀가 맞다.


이것이 류차달의 9세손인 진산군 류인비가 진주류씨의 관조가 되는 이유다. 한림학사 류 순의 아들 중 막내(季子)로서 위의 형들과 관적을 분리하고 선긋기를 할만한 사유가 충분하다.
진주류씨가 번성하는 계기를 맞은 것은 류인비의 손자 대부터였던 것 같다. 손자는 둘이었는데 모두 고려조에서 중용되면서 후사를 크게 열게 된다.

 

류인비의 큰손자인 류혜방은 지영광군사를 역임했으며 증손자인 류 구(1335~1398)가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익양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류 구는 정몽주와 문재를 다투었던 문신. 정몽주가 장원급제한 문과에 급제하고 홍건적의 난 때 개성수복 2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명나라와의 외교분쟁 때 18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귀국하여 세상을 떠났다. 사관이 실록에 “근검절약 불무외식”이라 평했으며 후에 청백리로 녹선됐다.

 


류 구의 아들 류 겸도 1380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 조선 태종대에 광주 목사, 좌우 사간대부, 형조참의를 거쳤다. 청백리로서 ‘썰어놓은 옥에는 검은 붕어들만 덤비고, 내가 놀리는 수저에는 기장만 있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들 4형제를 두었으며, 위 3형제 류 이(柳怡), 류 열(柳悅), 류 척(柳   )은 진주류씨 이판공파, 북부령공파, 시윤공파 등으로 분파하면서 오늘날 진주류씨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 파 중의 3대 파로 번연했다.


한편 중시조 류인비의 둘째손자인 류혜손은 판첨의평리 밀직사를 역임한 인물로 일찍부터 학문이 높고 절의가 있던 인물이다. 딸이 목은 이색의 며느리로 출가했고, 본인은 안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성계가 조선태조로 즉위하던 때에 아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안간공 류혜손은 현재의 진주류씨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 파종회 중 하나로 번연하고 있다.


고려말을 지나 조선조에 이르면서 진주류씨는 문무 양면에서 명실상부한 벌열 가문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가 각각 세거하는 지역은 지역적으로 연관성이 별로 없이 완연하게 분리가 되고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본관지인 진주에 세거지가 없는 것과 비유할만하다.


즉 한 곳의 세거지에서 조금씩 인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별로 없는 먼 지역에서 동떨어져 각각의 집성촌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조선조에 문과 77명, 무과에 380명이 급제한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문무를 통틀어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지방 관직에 나갔다가 그곳을 세거지로 삼아 집성촌을 이루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진주류씨의 파조(派祖)가 되는 주요 인물들을 고양시 행신동 향토문화유적지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이중 류 구, 류 겸 류진동, 류 형, 류 림 등의 묘소와 석물은 문화재〈사진〉로 지정돼 전국의 유림, 대종회 사람들이 견학 및 밴치마킹을 하고 있다.

 

이 묘역에는 자료가 없는 시조 이하 후손들의 단을 함께 마련하여 이곳에 건립한 제실 명인각에서 배향하고 있다. 4대 파종회 하부에 43개 지파가 대종회에 등록돼 있다.


4파 42지파
吏判公派:副正公 忠定公 僉使公 茂長公 晉溟君 孝成公 文成公 庶尹公 僉知公 / 北部令公派:連山公 結網窩公 奉事公 忠毅公 仁川公 野堂公 裁寧公 雲山公 兵使公 浦翁公 僉使公 經歷公 佐郞公 忠壯公 / 寺尹公派:參奉公 參議公 承旨公 / 安簡公派:素齋公 謙齋公 江陰公 承旨公 節度使公 東岩公 監察公 直長公 持平公 大司憲公 僉使公 忠靖公 大司成公 兵使公 伴鷗堂公 菁陽君



역사속의 진주류씨 인물


고려·조선조 상경종사 인물 많이 배출
문과 77명 무과 380명 급제한 충신 다수

상신, 대제학, 청백리, 절의, 공신, 통제사 등 문무총신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고려와 조선조에서 발견되는 역사인물을 살펴본다. 고려의 삼은으로 꼽는 목은 이색의 집에 딸을 며느리로 보낸 안간공 밀직사 류혜손은 목은과 교류한 시가 남아 있다.

 

류 구는 정몽주와 같이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공양왕 때 명나라와의 외교분쟁으로 18개월 동안 억류돼 있었을 만큼 고려조의 중신이었다. 류 염은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고 세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됐다.

 

류 겸은 류구의 아들로 형조참의를 역임하고, 변계량, 허 해, 이 원 등과 교유한 시가 남아 있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는 주로 문신들이 이름이 높고 중기 이후에는 무관들의 이름이 두드러진다. 조선중기 이후 병란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진충보국의 정신으로 활약한 탓이다. 따라서 원종공신, 원종훈에 봉해진 인물이 많다.

 

류순정(柳順汀)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중종반정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정국공신 일등으로 책록되었고, 중종묘(中宗廟)에 배향된 문무 겸비한 공신이다.

 

류진동(柳辰仝)은 도승지 대사헌 오위도총부도총관 등 문무 겸비한 인물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다. 류 빈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경기관찰사로 재임중 순직한 문신이다.

 

그 외 류 형은 류진동의 손자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고, 이순신 장군도 생전에 후임자로 지목해두었을 만큼 진충보국의 공신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으며 황해병사로 재직중에 순직했다. 해남 용정사, 공주 충렬사에 배향되고 있다. 이후 류 림, 류경종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제시한 역대 인물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시호 생략).


大提學(2명):류 구, 류 염 / 淸白吏(4명):류 구, 류 겸, 류 염, 류 빈 / 相臣(2명):류순정, 류 부 / 書畵(4명):류진동, 류시정, 류혁연, 류덕장 / 節義(5명):류용근, 류 정, 류취장, 류후장, 류풍노 / 功臣(7명):류 구, 류순정, 류계종, 류 영, 류 홍, 류순익, 류효걸 / 享祠(4명):류순정, 류 형, 류 림, 류지화 / 統制使(10명):류 형, 류 림, 류혁연, 류비연, 류성채, 류성추, 류진항, 류효원, 류화원, 류상경/ 孝行錄(14명): 류 의, 류기수, 류동진, 류선기, 류홍원, 류현장, 류희노, 류석남, 류석원 김병만, 윤씨(유영석처), 이씨(유익형처) / 登壇錄(4명) 류 림, 류혁연, 류상량, 류상필

(문과 급제자 77명, 무과 급제자 380명(병사 15명, 수사 13명)



현대의 진주류씨 인물

현대의 진주류씨의 명사들도 문·무 양 분야에서 두루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부터 60여년이 흐르는 기간 동안 무신이 많았던 집안답게 장성출신이 6명이나 된다. 그런가 하면,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집계한 결과 대학교수가 33명이나 되고 현역 국회의원이 2명이다.


진주류씨 명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류근창(대종회장, 육군중장), 류근환(육군소장), 류근무(육군중장 재향군인회부회장), 류수희(육군준장), 류홍규(공군준장), 류희인(공군준장), 류선호(변호사, 국회의원), 류근찬(방송인, 국회의원), 류근일(조선일보 주필), 류희락(한겨레신문 편집국장), 류상렬(건설부차관), 류창무(중소기업청장), 류래윤(동서울대학교이사장), 류석영(수원대학교대학원장), 류석성(부천신학대학교 부총장), 류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 류희수(화인화학회장), 류성호(국제제과회장), 류방희(풍산건설회장) 등(지면 관계상 명망 있는 다수의 관료, 대학교수, 기업인 등 생략함).



진주류씨의 인구분포

경기·충청도 두 곳에 집성촌 집중 현상
柳氏중 진주류씨 6만104명 10%차지

류(柳)씨를 쓰는 성씨는 총 60만 3084명으로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 순위는 상당히 상위에 올라가 있다. 이중에서 진주류씨는 6만104명으로 10%정도에 이른다.

 

진주류씨는 이류(移柳- 문화류씨계)와 토류(土柳)계로 구분되지만 그 연원은 달리 하고 있다. 이 구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따라서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상의 성씨 본관별 인구분포 조사 결과로는 이류(移柳- 문화류씨계)와 토류(土柳)계의 인구가 각각 몇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류(移柳- 문화류씨계)나 토류(土柳)계 대종회가 각각의 집계방식으로 인구수를 확인하지 않는한 앞으로도 파악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족보나, 성씨관련 모든 자료에서는 이류(移柳- 문화류씨계)와 토류(土柳)계를 구분하지만 통계청 자료는 아직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류-문화류씨계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파악한 집성촌의 내역과 전국 인구분포를 파악해 보면 그 윤곽이 대충 드러난다.

 

이농현상으로 서울, 부산, 수도권 등으로 인구가 집중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서 유서 깊은 진주류씨의 집성촌이 사라지고 있지만 2000인구주택 총조사 지역별 분포 현황을 보면 그 흔적이 발견된다.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제시한 파별 집성촌 자료에 따르면 파별로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파별 집성촌

이판공파=경기도:남양주, 안성, 용인, 부천, 강화 / 경상도:상주 / 황해도:연백
북부령공파=충청도:공주, 보령, 당진 / 전라도:영암
시윤공파=경기도:파주, 강화 / 충청도:천안 / 강원도:원주
안간공파=경기도:여주 / 충청도:부여, 논산 / 전라도:김제 / 강원도 철원 등이다.


인구분포로 보면 경기도에 집성촌이 많은 편이고, 충청도가 다음으로 많다. 주요 성씨본관과 세거지가 영호남에 집중하는 데 비해 특색이 있는 성씨 본관이라 할 수 있다.

 

수도권 인구는 최근에 급격히 증가하여 본관별 인구분포 자료가 될 수 없으므로 제외하고 충청권의 집성촌 인구밀도를 살펴보면, 토류 진주류씨와 일부 섞여 있다고 해도 아직 집성촌으로서의 자취가 남아 있다.

 

공주 675명, 보령 156명, 당진 166명, 천안 1112명, 부여 123명, 논산 163명 등이다. 충청권 시군 단위에서 이정도 인구분포는 밀집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인터뷰-진주류씨 류 근 창(柳根昌) 대종회장

‘40년 저력’ 중시조묘역 사적지화

류근창 진주류씨 대종회장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70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고 국방부 차관, 원호처장, 한국 토지공사 사장, 한국 주택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올해 83세이고 진주류씨 대종회장을 비롯하여 류관순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을지무궁훈장 등 훈포장과 대통령표창 등을 다수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시 제기동 류관순기념사업회회장실에서 류근창 회장을 만났다.

매년 5월 200여명에 장학금 지급
현조들 한분 빠짐없이 찾아 자료화

류근창 진주류씨 대종회장은 20년쯤은 젊어 보였다. 군 생활을 하던 때의 생활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바쁘게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주류씨 대종회를 맡은 것은 1965년부터였다.

 

올해까지 하면 42년. 진주 류씨 대종회 사업을 수행하는 실무진 3명이 배석하여 대종회가 1942년에 조직됐다고 말했다.

 

고양시 화전에 있던 진주류씨 선영이 1934년에 일제의 탄약창고 군용지로 징발 수용되어 수년 동안 고심을 하던 끝에 전국의 진주류씨 후손들이 모여 ‘진주류씨 종회’를 만든 것.

 

그러나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진주류씨 대종회의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보다 못한 대종회 임원들이 1965년에 류근창 당시 5군단장에게 류씨 집안의 중심을 잡고 대종회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기를 부탁하며 만장일치로 대종회장으로 추대했다.


대종회를 무려 40여년을 이끈 저력이 무엇일까. 군 경력, 국방차관, 원호처장, 한국토지공사 사장 등 요직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이 컸을 것 같다. 류 회장 체제에서 족보를 두 번 편찬하고, 고양시에 있던 선영을 경기도 향토문화유적지로 정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토당 근린공원내에 선영이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중시조 할아버지부터 9세손까지의 묘역이 어린이들이 밟고 뛰고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될지 몰라서요. 하지만 관리가 잘되고, 부속건물들을 갖추어 어느 문중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게 됐습니다.”


전국의 주요 성씨 본관 대종회에서 이 묘역을 밴치마킹해 가고 있다고 배석한 실무진이 말했다. 묘역에 제실, 강당 등 여러 부속 시설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묘역은 호화스럽지가 않고 중부지방, 특유의 전통 분묘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석물이나 봉분의 돌로 화려하고 크지 않게 단장한 것이다.

▷장학금도 넉넉하다고 들었습니다. 재원은 대종회 건물임대수입에서 나오겠지요?


“매년 5월에 선영 묘역에서 200여 명의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부모까지 하면 500여명이 모이는 종중의 큰 행사입니다. 매년 1억 2000~3000만원 정도를 지급하며 올해 19회째입니다. 작년까지 2000명이 혜택을 받았어요.”


▷숭조의식을 고취시키는 조상 찾기 자료 발굴사업도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진주류씨 문집도 내고 진주류씨 인물 283명에 대한 인물집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전자족보와 CD로 만든 자료집 등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서나 각종 문집, 비문 등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 진주류씨 현조들을 한분 빠짐없이 찾아 자료화할 생각입니다.”

▷종택과 사당은 어떻게 관리가 되고 있는지요?


“대종손 종택 유지를 못하고 4개 파별로 종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조를 배향하는 사당, 제실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사당 서원은 대원군 시절 대부분 혁파됐으나 공주 충렬사, 김제 남산서원, 해남 용정사 등 몇몇 사당이 있습니다.

▷대종회를 운영하는 원칙이 있다면? 그러고 4대파종회와의 관계는 어떠신가요?


“우리는 대종회가 독주하지 않습니다. 파종회장들과 수시로 만나고, 총회나 종중에서 중지를 모아야 할 사안이 생기면 함께 의견을 나눕니다. 각 파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내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게 확실한 구심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43년 동안 이렇게 했습니다.”

▷행사 때에는 종회원들이 많이 모이는가요?


“봄 장학금 지급행사 때 500여명, 음력 10월 1일에 하는 세일사 시양 때 400~500명 정도 모입니다. 이때는 조상에 대한 산 교육장이 되지요. 10월 1일 이후 각 파별로 전국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보통 20일이 걸려 끝이 납니다.”

▷진주류씨의 가풍이나 성향은 어떻다고 보는지요?


“인물전을 보면 알겠지만 어느 종중 못지 않게 인물이 많습니다. 효행자, 문과 장원 급제자도 많은데 군인 계통이 특히 많았던 것 같아요. 내가 살던 공주에서는 류대장집이라고 어영대장 포도대장, 훈련대장 등 무관의 가문으로도 알려졌지요.”


배석한 실무진 중 한 명이 파별로 조금씩 다를 것이라고 거들었다.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 무려 77명에 이르니 충분히 나올만한 의견이다. 그러나 무과 급제자 수는 380명에 이른다. 병사와 수사를 지낸 사람이 수두룩하다.


한편 류근창 회장은 대종회 일 말고도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회장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올해 도하 매스컴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교과서에 실린 류관순열사 초상화가 18세 소녀의 모습으로 수정됐는데, 류근창 회장이 4년여간의 공을 들여 이룬 성과였다.

 

본관은 류관순 열사와 다르지만 같은 류씨를 쓴다는 점에서 22년째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인연이 있는 듯하다.


한편 파주 통일동산 조성 때는 초대 고려선양회장으로 고려통일 대전 건설공사를 진두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고려에서 발원한 성씨이니 우연은 아니다.

 

백제, 고구려, 조선의 역사문화가 되살아나는 데 비해 고려 역사문화가 침체돼 있어 앞장섰다는 류근창 회장. 일정이 바빠 연신 시계를 보면서도 사진 촬영을 위해 편히 입던 점퍼를 벗고 풀어두었던 넥타이를 맸다.


이렇게 바쁘지만 대종회에 보내는 시간이 많다면서 “내 나이 여든 세 살. 우리 대종회가 앞으로도 화합하고 발전하는 대종회가 됐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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