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화와 닮은 日 류큐 왕국의 흔적을 더듬는다
조선문화와 닮은 日 류큐 왕국의 흔적을 더듬는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1.09 13:37
  • 호수 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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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류큐 왕국의 보물’ 展
▲ 류큐 왕국은 1609년부터 일본의 간섭을 받으며 매년 사절단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결국 1879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의상, 칠기, 음악 등에서 찬란환 문화를 꽃 피웠다. 사진은 류큐 사절단의 에도 행렬.

470여 년간 오키나와 지배하며 조선과 밀접한 관계 맺어
의복·칠기·도자기 및 각종 기록 통해 사라진 왕국 조명

조선 500년 문화가 꽃 피던 시절, 같은 시대에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서도 한 왕국이 번성하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된 지 37년 후인 1429년, 주잔(中山)의 2대왕 쇼하시(尙巴志)는 호쿠잔(北山)·난잔(南山)의 세력을 통합해 삼국시대를 끝내고 류큐(琉球) 왕국을 건설한다.
이후 류큐 왕국은 조선보다 40년 앞선 1872년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1879년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470여 년간 오키나와를 지배하면서 수많은 유물을 남긴 류큐 왕국을 재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류큐 왕국은 조선처럼 중국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았고 조선왕조실록에 450여회나 거론될 만큼 조선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그래서 조선처럼 유교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조선왕실 의상에 많이 사용된 용과 봉황,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 등이 류큐 왕실 의상에서도 발견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런 흔적이 남은 류큐 왕국의 유물 2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 왕실 의례용 기물.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전시는 크게 류큐 왕국의 역사, 문화, 외교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제1전시장에 들어서면 류큐 왕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 지도, 그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류큐 왕국은 기록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17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역사를 기록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류큐의 역사서’는 고작 7권에 불과하다.
하지만 류큐 왕국의 모습을 묘사한 다양한 지도와 그림 등은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류큐 왕국의 나하항 주변의 모습을 8폭 병풍에 담은 ‘나하 지역 항구 그림’은 8장의 사진을 이어붙인 듯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류큐 왕국을 통치한 세력은 쇼씨(尚氏)였다. 쇼씨 왕조는 나하항을 통해 각국에서 수입한 다양한 재료로 왕실의 고급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쇼씨 왕조의 유물은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의 남방제국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왕실 의복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특히 빙가타(紅型)기법으로 염색한 ‘왕자용 용보주문 빙가타 겹옷’이 인상 깊다. 빙가타 기법은 가타조메(型染)라는 종이에 무늬를 박아 염색하는 기법으로 무늬는 중국풍, 일본풍 남방풍 등 다양하다. 쇼씨 왕가의 옷에는 중국풍 무늬가 많이 사용됐다.

▲ 흑칠 나전 화조문 쟁반.

류큐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칠기였다. 류큐 왕국은 옻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음에도 중국에서 옻을 수입해 칠기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류큐 왕국의 칠기문화는 일본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17세기 전후로 나뉜다. 17세기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칠기가 많았다. ‘왕실 의례용 기물’에서는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칠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침금(浸金) 기법으로 화려한 수를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17세기 이후부터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흑칠기가 많이 제작됐다. 부용화와 한 쌍의 물총새를 화려하게 표현한 ‘흑칠 나전 화조문 쟁반’과 ‘왕실 의례용 기물’을 비교해서 보면 기법의 변화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류큐 왕국의 음악은 왕조 문화가 성숙한 17세기경 완성돼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에서는 류큐 왕국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악기들을 관람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악기는 산신(三線)이다. 줄이 3개 밖에 안 되는 기타처럼 생긴 이 악기는 중국의 삼현(三弦)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류큐 왕국에서는 산신을 이용한 산신악이 크게 유행했다.
이후 16세기 후반에는 일본 본토로 전파됐고 미(味)가 추가돼 ‘샤미센’(三味線)이라 불렸다. 류큐 왕국의 각종 의례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여성이었고 군역·농업·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류큐의 여성은 옷차림, 비녀, 반지 등으로 신분을 구분했는데 ‘류큐인 음악 연주 그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2전시장에서는 류큐 왕국이 외국과 교역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류큐 왕국은 중계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류큐 왕국은 조선을 중요 교역국으로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해 유교경전과 대장경 등을 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17세기부터 일본의 간섭을 받으면서부터 류큐 왕국은 지속적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류큐 사절단의 에도 행렬 그림’에서는 당시 사절단의 규모를 엿볼 수 있다. 또 ‘고려 장인이 만든 대천명 기와’를 통해서는 조선과의 교역 흔적도 발견 할 수 있다.
전시는 2월 8일까지 계속되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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