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 펼쳐지는 어르신들의 유쾌한 미술 수다
덕수궁에 펼쳐지는 어르신들의 유쾌한 미술 수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1.23 10:54
  • 호수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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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낭만수요일’ 프로그램 인기
▲ 미술 지식이 없어도 전문해설사의 문답식 설명을 통해서 쉽게 미술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

어르신들 전문해설사와 쌍방향 소통 통해 미술작품 입체적으로 이해
기획전시 등 무료로 관람… 거동 불편한 어르신들 자녀와 방문 가능

“먼지가 쌓이는 것은 시간이 쌓인다는 것이고, 시간이 쌓인다는 것은 사물과 작가와의 교감이 쌓이는 것입니다.”
지난 1월 21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제1전시실에선 한명희(여‧75) 어르신이 전문해설사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전문해설사는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모란디가 그림을 그리기 전 사물에 먼지가 쌓이도록 기다렸다고 설명하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이에 한 어르신은 전문해설사나 할 수 있을 법한 답변을 한 것이다. 한 어르신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는 어르신 대상 작품감상 프로그램인 ‘낭만수요일’을 신청한 후 이날 처음 덕수궁관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관과 과천관에서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65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낭만수요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각관마다 매주 20여명 내외 어르신들의 신청을 받아 전문해설사의 친절한 해설과 함께 유료전시를 무료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신청자가 1명밖에 되지 않아도 프로그램은 진행된다.
이날 한 어르신을 비롯해 덕수궁관을 방문한 10여명의 어르신은 낭만수요일을 담당하는 김혜정 전문해설사의 작품해설을 들었다.
낭만수요일의 경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품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시에서는 전문해설사에 의해 작품설명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해설사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설명을 하면 관람객은 소통 없이 듣는 입장이었다. 간혹 질문을 던지는 관람객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딱딱한 전시장 분위기에 압도돼 수동적으로 설명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낭만수요일에서는 작품설명을 쌍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날도 김혜정 해설사는 어르신들 왼쪽 가슴편에 붙은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며 질문을 던지고 어르신들의 답변에는 적극 호응해주며 작품 해설을 진행했다. 어르신들도 김 해설사의 질문에 의욕적으로 답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르신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전시장 내에는 간이의자가 마련됐다. 김 해설사가 어르신들을 마주본 채 앉아 작품설명을 하는 모습은 마치 까페에서 수다를 떠는 듯한 인상이었다. 실제로 김일미(여‧72) 어르신은 조명이 어두운 전시장 분위기에 긴장한 듯 설명 초기에는 몸도 움츠리고 답변도 조용한 목소리로 했다. 김 해설사가 일상적인 대화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리자 김 어르신은 김 해설사 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기는 적극적인 자세로 변했다. ‘수다’에 동참한 것이다.
낭만수요일은 지난해부터 실시된 프로그램이다. 과천관이 6월부터, 덕수궁관은 기획전시에 맞춰 9월부터 프로그램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각관 마다 한 회 평균 10여명, 월평균 50여명의 어르신이 찾고 있다.
초창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신청인원이 적었으나 최근에는 복지관 등 여러 기관에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추운 날씨에도 회당 20여명 가까이 참석하고 있다.
김 해설사는 “미술 작품은 어렵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많아 미술관 방문 자체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미술가들도 보통의 사람이었고 작품도 그들의 일상에서 나온 것이기에 설명을 통해 배경지식을 조금만 얻으면 어르신들도 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품설명 도중 김 해설사는 어르신들에게 모란디의 작품이 어떠냐고 물었다. 다른 전시회였다면 어색한 침묵이 흐를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10여명의 어르신은 각자의 목소리를 냈다.
“대충 그린 것 같다.”
“색채가 너무 어둡다.”
“비슷한 그림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그려도 더 잘 그릴 수 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모란디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차귀현(여‧69) 씨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전시장은 일순간 웃음꽃이 피었다. 김 해설사는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의 의견을 청취한 뒤에 모두의 답변이 맞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대로 모란디의 작품은 똑같은 사물을 재배치 혹은 높낮이를 바꾼 후 그린 게 많고 어두운 부분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충 그린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란디가 이렇게 그린 이유가 있습니다. 모란디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그리고 또다시 전시장은 김 해설사와 어르신들의 수다로 가득해졌다.
김 해설사는 “참석하신 어르신 대부분이 잔뜩 긴장한 채로 전시장 로비에 들어섰다가 ‘다음 전시 때 연락을 달라’고 말하며 대부분 만족하고 돌아갔다”며 “혹시나 혼자 오기 힘든 분들은 신청 후 자녀분들과 함께 방문해도 좋다”고 말했다.
덕수궁관에서는 2월 25일까지 계속되는 모란디 전이 끝나면 한 달여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2012년 타계한 수묵 추상화의 대가 정탁영 작가의 기획 전시를 열 예정이다.
과천관에서는 현재 ‘젊은모색 2014’, ‘김병기-감각의 분할’, ‘황종례-부드러운 힘’ 등 전시 외에도 다양한 상설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낭만수요일은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계속될 예정이다.
참가신청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oca.go.kr)로 하면 되고 컴퓨터 사용이 서투른 어르신은 전화(과천관 02-2188-6305, 덕수궁관 02-2022-0646)로 신청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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