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선거 4번, 자치단체장(시장) 선거 3번에 도전했다. 선거 전적은 3승 4패. 국회의원 4번 낙선, 시장 3번 당선이다. 이건식 김제시장 얘기다. 한 서울대 교수는 그를 두고 “연구 대상”이라고 했다. 남들은 한 번 치르기도 힘든 선거를 7번이나 치렀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김제 벽촌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제초·중, 익산 남성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원래는 별을 다는 게 꿈이었으나 14·15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세직 전 총무처장관의 권유로 옷을 벗고 정치에 투신했다.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훈련국장 등을 거쳐 13대 때 공천을 받아 고향에서 출마했지만 석패했다. 김제는 야당의 텃밭이다. 민주당 이름만 걸어도 따 논 당상인 곳이다. 유권자는 그에게 38%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첫 선거치곤 기적에 가까운 선거 결과였다.
이 시장은 “부족한 선거자금으로 자기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편지쓰기와 경조사 챙기기였다”며 “손으로 쓴 편지가 50만통이나 됐고, 시간·장소 불문하고 달려갔다”고 기억했다.
선거에 떨어졌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고 낙선 인사를 다녔다. 그런 그를 보고 주민들은 ‘당선된 사람은 코빼기도 안 비치는데 떨어진 사람이 인사 한다’고 혀를 찼다. 하루는 한 60대 아주머니가 음료수를 건네주며 “웬수 같은 돈 때문에 떨어졌구먼”이라며 눈물을 보여 참았던 울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2006년 시선을 지방자치단체장으로 돌렸다. 민선 4기 김제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됐고 이후 내리 두 번을 이겼다. 국회의원 선거 당시 뿌려놓은 땀과 눈물에 대한 보답이었다. 무소속 3번 당선은 신기록이다. 비결을 묻자 ‘아내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부인은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시장이 돼 새만금에 집중했다. 1억2000여만평의 매립지를 인근의 군산·부안이 대부분 차지하고 김제 몫은 13.2%에 불과했다. 최소한 김제 앞바다만이라도 얻어내야겠다는 일념으로 대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3년여 혼신을 다한 결과 김제 전체 땅의 27%인 4500여만평을 늘리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을 때나 감고 있을 때나 김제의 발전, 김제시민의 행복만을 생각했다. 국내 최초로 독거노인들에게 경로당을 숙소로 개방하는 ‘경로당 그룹 홈’을 창안해 노인복지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핵심은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는 잠자리와 샤워시설이다. 새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돈이 든다. 예산 범위 안에서의 방법을 고심했다. 전국적 인프라를 가진 경로당에 착안했다. 있던 방에 심야전기보일러를 돌리고, 화장실을 조금만 넓히고 보일러로 데운 물을 쓴다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시범적으로 경로당 1곳 당 1000만원을 들여 경로당 2곳을 그룹 홈으로 운영해보았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추위와 영양부족 등으로 거무스름했던 독거노인들의 얼굴이 3,4개월 만에 훤해졌다.
이런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이미 ‘민간용 보급품’을 만들어낸 ‘전과’가 있었다. 이 시장은 군 시절 처음으로 부대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엄동설한에도 싱싱한 야채를 중대원들에게 먹였고, 꽃을 가꾸어 장병들의 정서 함양에 기여했다. 또, 옛 우물터를 복원해 실용적인 야전 목욕탕을 만들고 실내에서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이발·목욕·세탁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경로당 그룹 홈 탄생에는 이런 창조·혁신의 발상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이 시장은 군 출신답게 애국심도 남다르다. 일찍부터 국보1호를 ‘훈민정음’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숭례문이 국보1호가 된 건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1호로 분류한 것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보 1호로 지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식 김제시장은 “숭례문은 불에 전소됐던 바 국보로서의 의미도 퇴색됐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훈민정음이 국보1호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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