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1. 김영란(80) 어르신은 최근 남편의 병세가 악화돼 동네에 위치한 단골 약국을 찾았다. 김 어르신의 남편인 정병진 어르신(85세)은 월남전 참가로 천식, 고혈압, 관절염, 뇌경색 등의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약국을 찾은 김 어르신은 “할아버지가 며칠 동안 코피가 나서 냉찜질하고 라벤다 연고를 발랐지만 좀 호전됐다가 코 안에 딱지가 생겼다 짓물렀다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약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약사가 평소에 계속 뇌경색 치료약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반복해 설명했지만 또 잊은 것이다. 약사는 “코피랑 짓무름 현상이 멈출 때까지 약 복용을 중단하라”고 다시 설명했고 김 어르신은 그제야 생각났다며 미안해했다.
#상황2. 오정남(72) 어르신은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항생제와 소염제, 기침약을 처방받는 오 어르신은 이날도 변함없이 약국에서 약을 조제 받았다. 그런데 기존에 조제 받은 약과 똑같은 약을 복용했지만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다음날 약국을 찾은 오 어르신은 “약을 복용하니 잠이 안온다”고 호소했고, 약사는 “평소에 커피 한잔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더라도 기침약과 커피가 결합하면 불면증이 올 수가 있다. 커피를 마신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 어르신은 “저녁에 한 잔 마시긴 했다”고 말했다. 약사는 “기침약만 먹거나 커피만 따로 먹을 때는 괜찮은데 두 가지를 같은 날 드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 일단 기관지염 약을 복용하는 동안에는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복약지도를 했다.
만성질환 등을 앓고 있어 약을 장기 복용하는 경우가 많은 어르신들은 매일 먹는 약이다 보니 약사로부터 복용 시기나 부작용 등을 들어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지장애와 함께 잘 안 들리고 안 보이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르신들의 복약 이행률(의사나 약사의 복약지시대로 따르는 비율)이 55% 이하라는 대한약사회의 연구결과도 있다.
일부 약국, 큰 글씨로 부작용‧복용법 안내하고 맞춤형 지도
약사회 “노인이 알아듣게 설명해야”… 단골약국 있으면 좋아
구체적으로 어르신들은 약병을 여는 데에도, 큰 알약을 삼킬 때에도, 인슐린을 처방량 만큼 맞춰 주사하는 데에도 큰 애로를 겪는다. 이러한 어르신들을 위해 의약업계에서는 노인복약지도를 여러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금방 잊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에 대한 안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특히 약사는 우리 몸에 이롭지만 독이 될 수도 있는 약을 환자에게 최종 건네주는 파수꾼으로서, 약에 대한 위험성을 깊이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약을 건네며 복약지도를 통해 올바르게 복용하게 만드는 사명과 책무가 있다.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M약국은 노인 환자가 많이 찾는 약국인 만큼 복약지도에 힘쓰고 있다. 다량의 약을 구매한 노인환자들이 복용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박화신 약사의 노인 환자 복약지도 비법은 바로 질문을 통한 반복학습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 하고 질문을 통해 확인과정을 거친다.
“기본적인 사항을 두 번 이상 말씀 드려도 기억을 못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빨간색 약은 하루 몇 번 먹어야 되죠?’ 되물으며 다시 인지를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또한 주변 약국을 통해서 알게 된 오·남용 사례를 환자에게 설명해 올바른 약의 복용을 강조한다. 실제 사례를 들면서 위험성을 강조해 올바른 약 복용의 필요성을 머릿속에 강하게 남기는 것이다. 박 약사는 “술을 드시고 약을 사러 온 환자분께 유사한 사례로 큰일이 있었던 환자분의 이야기를 했다”며 “아는 지역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내용을 전달하는데 매우 강력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인 복약지도는 물론 말상대가 되어주고 가족·취미 등에 대해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환자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습관이나 식성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응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약국을 언제나 열어놓아 환자들이 필요할 때마다 복약상담을 하는 곳도 있다.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S약국이다. 박덕순 약사가 운영하는 S약국은 20년 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니 단골 환자가 많다. 단골 환자의 70%는 노인이다. 그래서 노인 손님들에게 S약국은 ‘사랑방’과 다름없다.
그러나 20여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다 보니 약국을 찾던 단골 노인들에게서 이상 징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치매를 앓기 시작한 것이다. 30일치 약을 지어줘도 15일 뒤에 찾아와 약을 덜 줬다며 따지기 부지기수이고, 예전과 같은 돈을 내는데도 약값이 왜 이리 올랐냐며 의심하기도 했다. 하루에 세 번 먹어야 할 약을 먹은 것을 잊어버리고 또 복용해 4~5번 복용하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일이 빈번하다 보니 박 약사는 노인을 위한 복약지도 매뉴얼을 늘 머리에 숙지하고 있다.
친절한 복약지도는 기자의 눈에도 목격됐다. 한 어르신에게 약 이름을 설명하면서 “화요일 할 때 ‘화’요”라고 하자, 여러 차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던 어르신이 무릎을 탁 하고 쳤다. 내용도 구체적이다. “졸음이 올 수 있으니까 운전은 하지 마세요”라든가 “변이 검게 나올 수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 등 단순하지만 눈높이에 맞는 복약지도 방식이었다.
또한 다른 약국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글씨의 복약안내문도 눈에 띄었다. 기재된 복약 정보도 자세했다. 제품명과 성분명 그리고 효능과 주의할 점까지 다 들어가 있었다. 행여 이것이 부족할까 싶어 중요한 정보는 복약지도 과정에서 내용에 따라 다른 색깔의 매직을 이용해 큰 글씨로 한번 더 적어준다.
이날 약국을 찾은 배인호(84) 어르신은 “하루하루 다르게 눈이 침침해져서 약 성분을 확인하는 것이 힘든데 이 약국에 오면 복약안내문을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해 주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복용해야 할지 잘 확인할 수 있다”며 “매번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 주니 비교돼서 다른 약국은 가지 못한다”고 했다.
노인들의 복약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 ‘365안심약병’이라는 날짜별 약병을 개발한 약사도 있다. 누구라도 의약품 복용을 거르기 쉽다는 점에 착안한 365안심약병은 자동요일표시 기능이 탑재된 약통으로, 아침‧점심‧저녁에 따라 약통 색상이 다 다르다. 사용자가 약을 먹기 위해 뚜껑을 열면 통에 표시된 요일이 자동으로 다음 날로 전환되면서 복용한 날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한 복약지도가 이뤄지지 않는 약국이 많다. 이를 위해 대한약사회가 나서 복약지도 지침서 또는 약 종류에 따라 다른 복약안내서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 개별 특성에 따른 설명이 아닌 기계적 정보전달에만 그치는 복약안내서 제공은 부작용, 주의사항 등의 내용에서 환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환자 개인의 특수성을 감안하고 처방 전체 포괄적 판단에 따른 약사의 구두 복약지도가 반드시 병행돼야 할 필요가 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현재는 구두나 서면을 통해 복약지도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미 많은 약국이 복약안내서를 약 봉투나 종이에 프린트해 나눠주고 있다”며 “그러나 어르신들의 경우 젊은 환자들과 달리 약국에서 나눠주는 복약안내서를 버리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약국에서도 복약지도를 약에 대한 설명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질병을 관리할 수 있게 올바른 습관을 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노인 환자들은 약력을 잘 알고 있는 단골 약국을 만들어 복약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현재 대한약사회 산하 각 지역약사회에서는 노인들의 복약 이행률을 높이기 위해 찾아가는 복약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노인종합복지관이나 경로당을 방문해 유효기간이 경과된 폐의약품 처리 방법과 함께 올바른 약 복용법 등에 대해 복약상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서는 직접 집을 방문해 복약상담을 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또한 ‘어르신 건강 지킴이 복약수첩’을 배포해 안전하고 올바르게 의약품을 복용할 수 있게 했다. 복약 수첩은 휴대가 간편한 크기로 제작됐으며, 수첩 소지자의 질환 종류와 병력, 알레르기 반응 여부, 처방받은 의약품 등의 정보를 기재할 수 있어 의사나 약사가 노인들의 복약 정보 등을 빠르고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