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성지 된 원각사터는 문화재의 보고
3‧1운동 성지 된 원각사터는 문화재의 보고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2.26 13:36
  • 호수 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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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의 숨겨진 문화재적 가치

조선 세조가 세운 원각사가 있던 곳… 보신각종 걸려 있다 옮겨져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 외 보물3호, 3‧1운동기념탑 등 소재

▲ 탑골공원은 ‘뼈다귀 모양의 탑이 있는 공원’이라 불린데서 유래됐다. 이 뼈다귀 모양의 탑이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현재는 보존을 위해 유리관을 씌워놓았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학생대표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서울 파고다공원 대신 태화관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민족대표의 불참에도 정재용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파고다공원의 팔각정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후 태극기를 휘날렸다. 3‧1운동에 불을 지핀 것이다. 비록 3‧1운동은 7500여명의 사망자를 비롯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지만 임시정부가 설립되는 밑거름이 됐고 민족의 자긍심도 드높였다. 이런 성과에도 정작 이 운동의 진원지인 ‘탑골공원’의 유래와 문화재 등에 대해선 잊혀진 부분이 많다.
탑골공원의 명칭은 ‘뼈다귀 모양의 탑이 있는 공원’이란 의미의 탑골(塔骨)공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탑을 의미하는 파고다(pagoda)공원으로 바뀌었다가 1992년에 와서야 원래대로 탑골공원으로 개칭됐다.
그렇다면 이 공원의 이름을 낳은 ‘뼈다귀 모양의 탑’은 무엇일까? 남대문에 이어 국보 2호로 등재돼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다. ‘원각사 십층석탑’이 아닌 이유는 원각사가 지금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2월 19일 기자가 방문했을 때, 탑골공원 안팎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어르신들 대부분은 탑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탑의 유래가 된 원각사와 탑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서울 강북구에 거주하는 이 모(73) 어르신은 “공원 안내판에 적혀 있는 탑의 유래와 원각사에 대한 설명을 읽어봤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각사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곳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조로 넘어온 1464년(세조 10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사찰로 떠오른다.
중건을 위해 근처의 가옥 200여 채를 철거했고 군사 2100명을 동원해 3년간 공사를 진행한 것으로 보아 사찰의 규모는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특히 전국에서 동(銅)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십층석탑이 유명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대종이 보물 2호로 유명한 보신각종이다. 원각사 대종으로 불렸던 보신각종(현 국립중앙박물관 보관)은 원각사에 걸려 있다가 임진왜란 직후 종각으로 옮겨졌다. 이 후 1895년에 보신각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가 원각사 대종의 소리를 좋아해 자신이 행차할 때마다 반드시 종을 37번씩 울리게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원각사의 비극은 불교억압 정책을 시행한 성종 때 시작됐고 연산군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년)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에 옮기고 기생 1200여명과 악사 1000명 등을 배치해 유흥의 장소로 전락시켰다.
이후 원각사는 연산군의 실각 이후인 1514년(중종 9년) 호조(국가 재정 담당)에서 이곳 건물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수리에 쓸 것을 왕에게 요청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찰 건물은 전부 자취를 감췄고 원각사비와 십층석탑만 남게 됐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국보로 지정된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기와집을 본따 기둥, 난간,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히 조각했고 꼭대기에는 부처상과 보살상, 구름, 용, 사자, 모란, 연꽃 등을 아름답게 새겼다. 조선조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보존을 위한 유리관이 씌워져 있어 이런 솜씨를 자세히 보기 힘들다.
원각사 터가 공원으로 바뀐 건 고종 대이다. 영국인 브라운이 폐허로 변한 원각사지를 공원으로 바꾸자고 건의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1897년(고종 34년)에 서양식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브라운은 1893년 조선에 입국해 총세무사 고문으로 일하면서 조선 정부의 재정과 관련한 일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원각사 터가 서울 시민들이 가장 모이기 쉬운 곳으로서 주변에 장(場)이 섰던 점도 한몫했다.
현재는 예전의 위세를 찾아 볼 수 없는 작은 공원이지만 그 안에 채워진 유물들의 면면은 유명 유적지 못지않게 화려하다. 우선 공원 자체가 사적 354호로 지정돼 있고 원각사지 십층석탑 외에도 보물 3호 대원각사비와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 받침돌 등의 문화재, 3·1운동기념탑, 3·1운동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이 들어서 있다. 이로 인해 하루에도 꾸준히 관람객이 찾고 있다.
공원 관계자는 “탑골공원이 노인들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과 외국인들도 하루에 수십 명씩 문화재를 보러 온다”고 말했다.
입구인 삼일문에도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다. 광복직후 서예가 김충현이 쓴 현판을 걸었다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으로 교체됐다. 헌데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 현판을 걸 수 없다”며 이를 뜯어내는 사건이 발생했고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협의 끝에 2003년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해 달았다. 현판의 ‘삼’자와 ‘일’자는 독립선언서의 글씨체를 이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 학생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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