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난 마을 재건하는 모습 보고 박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시작”
“홍수 난 마을 재건하는 모습 보고 박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시작”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4.08 14:46
  • 호수 5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촌 근대화의 역사… ‘내가 경험한 새마을운동’

청도 신도1리 이종두 어르신 “1957년부터 마을가꾸기… 부업장려로 과수 키워 소득 증대”
포항 문성동 이석걸 어르신 “마을진입로 확장·지붕 개선 등 새마을운동 성공 모델 제시”

“1969년에 경상도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제방이 무너지고 난리가 났어요. 이때 우리 마을의 노인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제 할 일은 미뤄두고 제방 복구와 마을 안길을 보수하는데 힘을 모았죠. 근데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모습을 본 거에요.”
경북 청도군 신도1리경로당 이종두(77) 회장은 반세기 가까이 지났음에도 당시 수마에 마을이 휩쓸려간 풍경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에 따르면 길은 끊어지고 둑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범람한 물에 휩쓸려온 쓰레기가 농작물들과 뒤엉키고 키우던 가축들은 진흙더미에 깔리는 등 한국전쟁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친 후 주민들의 협동으로 마을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더 나아가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신거역’이란 간이역도 개설했다.
간이역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박 전 대통령이 이곳을 지나다 재건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 마을의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고민이었던 농촌 발전의 해법을 찾았다. 이후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관회의를 개최한 박 전 대통령은 신도1리의 사례를 소개하며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한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제창하다
2011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새마을의 날’이 오는 4월 22일 5주년을 맞는다. 1972년부터 지자체별로 제정‧운영한 새마을의 날을 정부 차원에서 실시하고자 2011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을 개정 시행함으로써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새마을운동은 1960년대 발생한 심각한 도농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됐다.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연평균 9%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산업화와 이농형상으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새마을운동은 초기 사업의 단위를 협동 풍습이 남아 있는 ‘마을 단위’로 정했다는 점이 성공요인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1970년 4월 22일을 기점으로 새마을운동을 국가정책사업으로 정하고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각각 시멘트 335포대와 철근 1톤을 공급했다. 이듬해 사업성과가 우수한 마을 1만6600개를 재선정해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씩 추가로 지원하며 새마을운동의 성공 기틀을 다진다.
애초에 새마을운동은 초가집을 없애고, 좁은 골목길과 비좁은 농로를 확장하고, 농기구를 근대화하는 등 농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됐다. 1974년부터는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한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됐고 1976년에는 도시지역의 공동체의식을 높이고 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를 위해 ‘도시 새마을운동’으로 발전한다. 이후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해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돼 민간주도 운동으로 전환됐다.

▲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북 청도군 신도1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수해를 복구하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진행한 사업이다. 이 운동을 통해 농촌의 근대화가 성공했고 이는 국가발전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1970년대 신도1리 주민들이 농수로를 정비하는 모습.

농촌 근대화 발상지, 신도1리
이 운동의 시발점이 신도1리였다. 신도1리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1957년부터 마을 자체적으로 농촌 환경 개선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젊은피’였던 이종두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먼저 실시한 건 도로 확장이었다. 마을 뒷쪽 골짜기 뒤실마을과 현재 위치인 새터마을을 잇는 2.5km의 길이 있었는데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어 토끼길로 불렸다.
이 회장은 “주민들이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밀양 등지에 팔았는데 산으로 통하는 마을 어귀 길이 좁아서 지게로 간신히 드나들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길을 넓히려면 담장을 뒤로 물리고 감나무도 잘라내야 했지만 주민들은 이런 피해를 감수하고 힘을 합쳤고 한 달여 만에 폭 4m의 농로를 만들었다. 1959년부터는 부엌을 개량하고 돌담을 블록 담장으로 바꾸는 등의 마을 개선 작업을 진행했다.
신도1리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1년에는 부업장려 사업으로 가구당 감 묘목 50그루, 복숭아 10그루, 사과 1000그루 이상 갖기 운동도 진행해 농가 소득을 올리는 효과를 냈다.
이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은 새마을노래에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라는 가사가 있는데 우리 마을은 1950년대 말부터 이를 실천했다”고 말했다.

성공 모델 제시한 문성동
신도1리가 새마을운동의 진원지였다면 첫 성공사례로는 경북 포항시 북구 문성동(당시 영일군 기계면 문성리)이 거론된다. 한때 신도1리와 함께 발상지를 두고 논란이 될 정도로 초반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역으로 손꼽힌다. 초창기 문성동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며 마을 발전의 초석을 일군 이석걸(88) 어르신은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제창 후 배포된 시멘트 335포대와 철근 1톤을 어디에 써야 할지 다른 마을이 우왕좌왕했던 것과 달리 이 어르신을 비롯한 문성동 주민들은 공동우물과 하수도·소하천을 정비하고 마을 안길을 넓히는데 사용했다.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농한기인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개월 동안 사업을 추진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의 첫 성공사례인 경북 포항시 북구 문성동을 시찰하는 모습

이 어르신은 “당시 ‘남보다 앞장서자’, ‘남에게 의존하지 말자’, ‘농한기에 노름을 하지말자’를 마을 지표로 삼아 단결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자신의 집에 ‘새마을가꾸기 상담소’를 설치하고 사업추진에 따른 애로사항과 문제점을 해결해 주며 슬레트·리어카를 공동구매하고 시멘트 블록과 거푸집을 제작하는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 지역 유지들을 일일이 만나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문성동 새마을운동은 1970년 11월 마을진입로 개설을 시작으로 당시 영일군 지역 새마을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마을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됐고 문성동의 눈부신 활동상이 방송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기도 했다.
문성동은 주변 마을보다 먼저 기계천에서 마을 안까지 이어진 논두렁길을 확장했다. 마을진입로는 폭 5m, 길이 800m 직선도로를 개설하고 국도에서 하천까지 1km를 확장했다. 이를 통해 자동차·농기계·리어카 운행이 가능하게 했고 사료·비료·퇴비·양곡 등 농자재를 원활하게 수급 받아 마을 발전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었다.
1971년 8월 열린 경제기획원회의실에서 열린 경제동향보고 때 문성동의 성공사례가 발표됐고 이 어르신은 성과를 인정받아 국민 포장을 받았다.
이 어르신은 “문성동이 주변 마을 중에 가장 못사는 마을이었는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룩한 성과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남긴 성과는 눈부시다. 먼저 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영농의 과학화, 새마을금고 육성,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 생산품 품질개선과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농촌 혁명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유엔세계식량기구와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 등은 빈곤퇴치 모델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했다. 현재 140여 국가에서 새마을 교육을 이수했고 50여개 국가에서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3년 6월에는 새마을운동 기록물 2만2084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새마을운동을 당시 최빈곤 국가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는데 초석이 됐다고 평가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