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노인협회연합회와 우호협약식 위한 연변 방문기
중국 조선족노인협회연합회와 우호협약식 위한 연변 방문기
  • 어호선 대한노인회 이사
  • 승인 2016.06.24 13:51
  • 호수 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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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흐려 ‘천지’ 못봐… 통일돼 우리 땅에서 오르라는 하늘의 뜻인 듯”

대한노인회 지도자들은 6월 14~17일 중국 조선족 노인협회연합회와 우호교류협약식을 위해 연변을 다녀왔다. 협약식을 마치고 일행은 백두산 등정, 연변노인활동청사와 윤동주 시인의 모교 용정중학교 등을 방문했다. 이번 중국 방문길에 동행한 어호선 이사가 기행문을 ‘백세시대’ 편집국으로 보내왔다.

▲ 대한노인회 임원들이 목단강변에 조성된 ‘팔녀투강비’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팔녀투강비는 일본군과 싸우다 강에 투신한 항일 여성대원들을 기리는 것으로 이 가운데 2명이 조선인이다.

한국의 복지관 같은 연변노인활동청사… 태권도·한국춤 등 가르쳐
윤동주 시인 모교인 용정중학교 들어서자 서시 시비와 동상이 반겨

6월 14일 이른 새벽, 인천국제공항 3층 1번 출구 A카운터 앞은 노익장들의 해맑은 웃음꽃으로 가득했다. 이는 중국 조선족노인협회연합회와의 우호교류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대한노인회 임원들의 면면이다.
미소여행사측의 친절한 수속으로 출국 준비를 마친 일행은 예정대로 현지시간 10시 30분(우리나라 시간보다 1시간 늦음) 목단강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현지식으로 점심을 마친 일행은 4시간 이상을 달려 ‘이도백하’란 지역에 도착했다. 연변지역의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은 한글과 한문으로 함께 표기돼 있었다. 외국에서 한글로 쓰인 간판을 보니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지역만큼은 한글과 한문을 병기하게 돼 있는데 그것도 한글을 앞에 쓰게 돼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첫날은, 우리나라 일류호텔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의 수준인 보석국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오전 일정으로, 백두산 천지를 보기로 했다. 등정코스는 북파코스와 서파코스 그리고 남파코스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는 북파코스를 통해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어쩌랴!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전날 밤 비가 온데다 안개가 자욱이 끼어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꼬불꼬불 백두산을 휘감아 돌면서 올라갔으나 천지는 보이지가 않았다. 안타깝게도 주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만을 남기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종잡을 수 없이 날씨가 바뀐다는 백두산은 한여름인데도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는가 하면, 한 쪽엔 아름다운 노란 야생화가 수줍은 듯 피어 있었다.
필자는 20여년 전과 7년 전 서파코스를 통해 백두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느라 어려움은 있었지만, 두 차례 모두 안개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덕분에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전경과 천지의 기운을 온몸에 듬뿍 담고 돌아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북파코스에서 바라보는 천지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 그러나 이 심 중앙회장의 말처럼, 훗날 다시 한 번 와달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고, 나아가 조국통일 후에 중국 땅이 아닌 우리 땅을 밟고 백두산을 등정해 달라는 암묵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때까지 건강을 더 잘 다져야하지 않겠느냐는 긍정적인 결론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장백폭포(일명 비룡폭포)엔 안개가 걷혀 선명한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다음은, 이번 방문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중국 조선족노인협회연합회와의 우호교류 협약이었다. 연길국제호텔 3층에서 가진 협약식에는 양측에서 각기 34명의 노인회 임원들이 참석했다. 양측 인사들에 대한 소개에 이어, 전평선 중국 조선족노인협회연합회장의 환영사와 대한노인회 이 심 회장의 답사가 있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이 심 회장은 이번 기회를 통해 중국에 있는 조선족노인들 10명에게 무릎관절 수술비 1인당 800만원(수술과 재활 등 입원비 전액)을 지원하는 증서를 기증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양측 대표가 서명한 우호교류협약서를 교환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어 대한노인회 주요사업 소개와 조선족노인연합회에 대한 사업 소개를 끝으로 협약식을 마치고, 만찬과 함께 축하무대의 막이 올랐다. 무엇보다, 조선족 여인들의 아리랑에 맞춰 이어진 고전무용은 박수갈채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 노인들은 거개가 3세들로, 비교적 생활은 괜찮은 편이라고 전했다. 우리나라 연금제도처럼 중국에선 퇴직비제도가 있는데 매년 중국 돈으로 2300위안(우리돈 40만7000여원) 정도를 국가로부터 지급받는다고 귀띔을 해줬다. 이는 일반 회사에 근무하다 퇴직한 경우이고 공무원이나 교사 등으로 퇴직한 사람들은 더 높은 퇴직비를 지급받는다며 흡족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농민들도 1년에 1000위안 정도를 국가로부터 지급받는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중국 당국이 노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정책을 펴고 있는 관계로, 큰 불평이나 불만은 없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대한노인회 이형술 이사가 우리의 복지관 같은 시설인 연변노인활동청사의 노인대학 서예반에 들러 붓글씨를 써 보이고 있다.

다음날 연변노인활동청사를 방문했다.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복지관 같은 곳이었다. 우리 대한노인회도 시군구 지회 별로 노인대학이 마련돼 있는 것처럼 이곳에도 노인대학이 설치돼 있었다. 교양강좌를 비롯해 무도교실과 노래교실, 서예, 태권도, 탁구, 한국춤, 바둑, 장기, 마작, 당구, 건강교실 등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장기판이 우리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큼 컸을 뿐더러 사(士)도 보통 장기 알만큼 크기가 큰 게 중국 장기의 특징이기도 했다. 연변노인활동청사를 둘러보는 동안, 중국연변한국인회 조선순(여) 상임고문이 친절히 설명을 곁들여주었는가 하면,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아쉬움의 배웅을 해 무척 고맙기도 했다.
오후엔 ‘선구자’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을 차창 밖으로 지나치면서 본 후 많은 독립지사들을 배출한 용정중학교(옛 대성중학교)를 방문했다. 교문을 들어서자 윤동주 시인의 유명한 ‘서시’가 새겨진 시비와 동상이 우리를 반겼다. 나라 없는 슬픔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일제에 항거하며 나라사랑을 불태웠던 시인의 숭고한 희생정신 앞에 우리 자신이 너무 초라해짐을 감출 길 없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2층에 마련된 전시관을 둘러보고 1층에 윤동주 시인이 공부했던 교실도 둘러봤다.
점심은, 대한노인회가 중국 조선족노인협회연합회 측에 답례 오찬으로 준비한 자리였다. 몸은 서로가 이국 만리 떨어져 있지만 이 시간만은 핏줄을 같이한 노인들끼리 한마음이 된 채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고 정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이 자리에선 올해 구순을 맞은 서원석 부회장과 팔순을 맞은 김광홍 부회장 그리고 이순옥 감사에게 축하 꽃다발이 전달돼 참 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끝으로 양측을 대표한 노인들의 흥겨운 노래와 여흥은 서로간의 끈끈한 정을 잇고 새기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우리 일행은 ‘도문’으로 이동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북한 땅을 바라보는 기회였다. 이 지역은 필자가 현직에 있을 때 취재를 위해 몇 차례 찾은 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100m 안팎 강만 건너면 기아와 고달픔에 시름하는 같은 민족이 사는 북한 땅. 겉으론 평온한 것 같지만, 헐벗은 산야를 바라보는 내 마음 이상으로 그곳은 스산하고 썰렁해 보였다. 한없는 연민의 정이 솟구침을 억누를 길 없었다.
다음날 중국을 떠나기 위해서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다시 ‘목단강’으로 이동을 해야만 했다. 거리상으로 멀기도 하거니와 밤길이어서 다섯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무료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 심 회장이 묘안을 내놓았다. 각자 자신을 털어놓는 시간을 갖자는 제안이었다. 앉은 자리 순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지루하고 무료함을 잊는 퍽 유익한 시간이됐다.
마지막 밤을 목단강하와이호텔에서 보내고 공항까지 오는 도중에 목단강인민공원을 들렀다. 이곳엔 항일 영웅 팔녀열(八女烈: 한국인 여성 2명 포함)의 넋을 기리기 위해 ‘팔녀투강비’(八女投江碑)가 세워져 있었는데 일행 중 몇은 비 앞에서 잠시 애도의 묵념을 올리기도 했다.
출국 때의 항로도 마찬가지였지만, 입국 때의 항로도 하얼빈과 장춘, 심양, 단동반도를 지나 중국령 서해를 거치는 우회 항로를 택했다. 아마도 북한 땅을 거치는 직항로로 비행한다면 거의 절반 이상으로 좁혀지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기내에서도 조국의 분단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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