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 왕조 흥망성쇠 보여주는 ‘법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 흥망성쇠 보여주는 ‘법궁’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7.01 13:34
  • 호수 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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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궁궐을 가다 <1> 경복궁
▲ 조선 왕조 임금이 살았던 법궁인 ‘경복궁’은 근정전(국제 제223호), 경회루(국보 제224호), ‘경복궁 아미산 굴뚝’(보물 제811호)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을미사변의 가슴 아픈 현장인 건청궁 터 등을 통해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조준우 기자

정도전이 ‘큰 복을 누리라’는 의미로 이름 붙여… 근정전 앞이 조정
임진왜란 때 전소, 대원군이 중건… 일제 때 무차별 훼손되는 아픔

광화문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해박한 사람이라면 광화문광장 끝에 위치한, 광화문을 정문으로 하는 경복궁을 생각했을 것이다. 광화문은 현재의 모습만 놓고 보면 보존이 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차례 철거됐다 복원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이 문이 지키고 있는 경복궁도 마찬가지다.
경복궁은 조선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5대 궁궐 중 첫 번째로 지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임금이 사는 궁)이다.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완성된다. 궁의 이름은 개국공신인 정도전(1342~1398)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근정전, 강녕전, 연생 전등 주요 전각의 이름과 함께 ‘큰 복을 누리라’는 의미로 ‘경복(景福)’이란 이름을 붙였다.
지난 6월 27일 광화문 앞에선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입구 양옆을 위풍당당하게 지키는 해태상이었다.
“잡귀를 쫓는 역할이 아닐까요?”
입구에서 만난 임여옥(여‧62) 씨는 해태상의 의미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가 원래 나쁜 사람을 내쫓는 영물이란 의미에선 임 씨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실제로는 하마(下馬) 표지였다. 원래는 광화문에서 8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고 이 해태상 앞에 도착하면 왕보다 지위가 낮은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광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경복궁의 법전이자 중심인 근정전(국보 제223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2층 월대 위에 웅장하게 들어선 건물로 왕의 즉위식, 사신 접견 등 국가 행사와 조회(朝會)를 하던 곳이다. 그리고 이 근정전의 앞마당이 조정(朝廷)이다. 중앙에는 삼도(三道)가 있어 근정전까지 이어지는데, 가운데 넓고 높은 길이 왕만 걸을 수 있는 어도(御道)다. 동쪽이 문관이 이용하는 길, 서쪽이 무관의 길이다. 이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 것을 삼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는 줄지어 늘어선 관원의 품계를 나타내는 품계석(品階石)이었다. 동쪽이 동반(東班) 곧 문반의 자리이고, 서쪽이 서반(西班) 즉 무반의 자리이다. 문반과 무반을 합쳐부르는 양반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넓은 조정 바닥에는 평평하지만 표면을 다듬지 않은 거친 돌이 깔려 있다. 박석(薄石)이라고 하는 이 돌들의 모양과 매무새는 궁 안에 쓰인 어떠한 석재보다 자연스럽다. 실제 이 길을 걸어보면 울퉁불퉁한 것을 느낄 수 있다. 표면도 거친 편인데 이는 미끄럼과 눈부심을 방지하고 자연배수로로 활용하기 위해 일부러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는 물이 고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근정전 뒤로는 왕과 왕비의 침실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이어진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270여년간 방치됐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重建)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의 계획적인 훼손으로 또 다시 제 모습을 잃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강녕전과 교태전도 이때 제 모습을 찾게 된다.
특히 교태전은 궁궐 안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곳으로 왕비의 고유 업무인 내명부(內命婦)를 다스리는 일을 비롯, 궁궐 안의 여성문제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업무를 주관하는 집무 공간이었다. 이로 인해 궁궐 생활의 중심이란 의미로 중궁전(中宮殿)이라 불렸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중전마마’다.
교태전은 또 강녕전과 달리 아미산이라 불리는 후원도 갖추고 있다.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이용해 쌓은 인공시설로 산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작은 둔덕에 불과하다. 아미산에는 교태전 온돌방의 연기를 배출하는, 황토색 벽돌로 쌓은 육각형의 굴뚝을 볼 수 있는데 보물 제811호로 지정된 ‘경복궁 아미산 굴뚝’이다. 흔히 상상하는 굴뚝과는 달리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돼 아름다운 위용을 뽐낸다.
아미산을 넘어서면 또 하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건청궁(乾淸宮) 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건청궁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왕권을 되찾은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만든 별궁이었다. 경복궁의 많은 전각처럼 일제에 의해 하나둘 철거돼 현재는 빈터만 휑하게 남아 있다. 이 건청궁터가 명성황후가 살해된 비극의 현장이다. 명성황후는 1895년 건청궁의 곤녕합(坤寧閤)에서 일본 자객에게 살해됐는데, 그 자리에 을미사변의 기록화를 전시하는 작은 건물과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를 볼 수 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자면 단연 국보 제224호 경회루다. 근정전을 바라보고 왼편으로 나가면 나오는 경회루는 인공 연못 위로 지어진 2층 누각 건물로,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에서 크기로도 또 아름답기로도 손에 꼽히는 건물이다. 이날도 가장 많은 인파가 이곳에 몰려 있었고 사전에 예약하면 내부를 특별 관람할 수 있다.
경회루는 주왕의 주지육림(酒池肉林)과 비견되는 연산군의 흥청망청(興淸亡淸)이 탄생한 곳이다. 연산군은 사신을 접대하거나 공신들을 위한 연회 장소로 사용됐던 경회루의 연못 위에 채붕(彩棚, 채색 누각) 세 개를 만드는 등 이곳을 향락의 공간으로 꾸몄다. 또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를 파견해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 각 고을에서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 기생의 명칭도 ‘운평(運平)’이라고 했는데 이 운평이 대궐로 들어오면 ‘흥청’(興靑)이라고 칭했다. 이 흥청들과 경회루에서 국가 재정을 물 쓰듯 하며 방탕한 생활을 한 그는 결국 중종반정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이때부터 ‘흥청이랑 놀다가 망했다’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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