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무기만큼 치열했던 문자 전쟁
한국전쟁 당시 무기만큼 치열했던 문자 전쟁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6.09.23 13:51
  • 호수 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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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임시수도기념관 ‘삐라-적의 심장에 종이폭탄을 뿌려라!’ 전
▲ 한국전쟁 당시 남한·유엔군과 중국·북한군은 도합 28억장의 삐라를 뿌리며 치열한 문자전쟁을 펼쳤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삐라들은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살포된 삐라의 모습.

한국‧UN군, 중국‧북한군 등 28억장 살포한 전단 중 120여점 소개
이간질‧폭로 등 내부 갈등 유발, 공포심으로 사기저하 등 내용 많아

지난 9월 5일, 다소 놀라운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북한의 한 전직 노동자 간부가 ‘개XX, 왜 우리는 못사는가. 평생을 노력했는데 모두 속았다’라고 쓴 종이를 평양 공공장소에 구겨 던지고 달아났다가 검거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지난해부터 김정은 체제를 비방하는 ‘삐라’(선동 글이 담긴 유인물)가 서평양역 주변에서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추석 연휴에도 탈북자 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 20여명이 북한을 향해 전단지 15만장을 살포하는 등 사라진 줄 알았던 ‘삐라’가 최근 부활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유엔(UN), 중국과 북한이 살포한 삐라를 한데 모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려 주목받고 있다. 오는 12월 18일까지 부산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열리는 ‘삐라-적의 심장에 종이폭탄을 뿌려라!’ 전에서는 120여점의 삐라를 통해 당시 긴박하게 돌아갔던 전시 상황을 재조명하고 있다.
삐라는 ‘전단’(傳單)을 뜻하는 ‘빌’(Bill)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말이다. 한국전쟁 기간 한반도에는 남한과 유엔이 약 660여 종 25억 장, 중국과 북한이 약 367종 3억 장 등 도합 28억 장 가량의 삐라를 제작·살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전시에는 대량 살포돼 잔존량이 비교적 많은 유엔과 남한 측 삐라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물량이 거의 없는 북한과 중국 측 삐라도 출품됐다. 부산박물관 자체 소장품도 있지만, 근대사료 수집가인 김영준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등 전문 연구자들의 도움으로 대여받은 전시품도 다수 포함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시는 크게 ‘한국전쟁과 종이폭탄 삐라’, ‘샬라면 지금 넘어오시오’, ‘둘 중 하나를 택하라!’ 등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소개된 삐라에는 안정된 의식주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것을 비롯해 고향에 남겨진 가족의 곤경을 상기시키고 이간질·폭로·비방·위협으로 내부 갈등을 유발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또한 신념에 대한 의구심과 추위·동상·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해 적의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 의지를 가지게 만드는 내용도 많았다.
이중 전장에서 고생하는 미군의 모습과 집에서 행복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그림을 배치한 삐라를 주목할 만하다. 미군을 겨냥해 북한군이 뿌린 삐라로 영어로 “정의롭지 못한 이 전쟁에서 싸우지 않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탈출 방법을 찾아보라”는 내용을 써 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
‘한국군은 압록강에 도착하였다’라는 문구와 한반도 전세를 그린 삐라도 인상적이다. 중국과 접경지역 근처까지 점령한 한국군의 좌표를 그려 북한 군인들의 투항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엔군의 압도적 화력에 고립된 북한 병사를 묘사한 삐라도 있다. ‘이제다! 그대의 운명을 결정할 때. 삶이냐? 주검이냐?’라는 다소 단호한 문구와 위축된 북한 병사의 뒷모습은 공포심을 유발한다.
귀순 시 소지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안전보장증명서(SAFE CONDUCT PASS)’나 통행증, 귀향증, 지폐 등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투항을 권유한 삐라도 이색적이다.
이외에도 ‘한강 도하 금지’, ‘경고, 목숨을 살려라’ 등 군사작전에 앞서 민간인을 통제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경고를 담은 선전물과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 ‘평양 점령’ 등 유리한 전황을 선전하는 삐라도 볼 수 있다.
또한 무기(군수물자)‧의료체계 등 유엔군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삐라와 이와 반대로 포로들의 평온한 생활상을 공개하고 선전하는 삐라, 공산 지도자 또는 미 제국주의자 등을 소재로 한 전단 등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임시수도기념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다양한 메시지를 통해 적군의 공포심을 유발하고 사기와 전의를 잃게 하는 위협적인 무기이자, 냉전시대의 프로파간다인 삐라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삐라에 담긴 대립과 반목의 메시지를 넘어 전쟁 종식과 평화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람료 무료.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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