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칼럼] 죽음 앞에 기죽지 않는 노년
[심천칼럼] 죽음 앞에 기죽지 않는 노년
  • super
  • 승인 2006.08.2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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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알라스카만 근해는 해수의 염분 농도가 낮다. 얼음이 녹은 물이 엄청나게 바다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산란기가 되면 이 청정의 얼음 녹은 물이 흐르는 알라스카 하천으로 연어가 떼를 지어 돌아온다. 수년 전 알라스카의 어느 계곡에서 회귀하는 연어 떼를 본 적이 있다.

 

그야말로 계곡에 연어가 꽉 들어차 물보다 연어가 더 많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오랜 만에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나서 모천으로 돌아오는 연어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60여년 만에 만났으니 우리가 연어처럼 돌아와 만난 것 아니겠는가.

 

모두들 연어 이야기에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떠나 있어도 마음으로는 늘 고향에 다녀오고, 대개들 유택으로 고향 언저리를 생각하기 마련이라 금세 통한 것이었다.

 

앞으로 좀 더 자주 만나고 옛날이야기하며 지내자는 의기투합도 이루어졌다. 이런 이야기들이야 돌아서는 즉시 잊어버리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은 모두가 즐거웠다.


하지만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을 터부시하는 것이 우리네 문화다. 연어 이야기도 길게 할 것이 못 됐다.

 

연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모천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야 아름답지만 결국 죽을 자리를 찾아온다는 것이니 객쩍은 이야기가 된다.

 

사실 오랜만에 만나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학자들이나 임종 케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음도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삶의 질도 좋아야 하지만 죽음의 질도 생각해볼 때라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보다 죽음 앞에서 비굴하고 비겁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고통의 총량은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어차피 고통을 겪을 것이라면, 연습을 해보고 그 고통에 면역을 길러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면 덜 비겁해질 수 있다.


늙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의외로 70세 위아래 대의 노년층들이 생각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두렵게 여기거나 굴욕적인 상황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 운전을 배우거나 컴퓨터 다루는 것을 해보지도 않고 기피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조금만 용감해지면 10년은 젊게 해줄 수 있다.

 

컴퓨터 키보드나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은 젊은이들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금도 인터넷에 수많은 노년층이 접속하고 있다. 인터넷은 텔레비전 켜 듯이 쉽다. 나이를 잊고 몰두하기 알맞게 재미있고 유익한 도구다.


‘나이 드니 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지레 포기하기 전에 생각해볼 일이다. 인터넷도 즐긴다는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 마을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연어의 모천회귀 본능을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대통령이 고향으로 퇴임하여 여생을 보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누구보다 오랜 기간 동안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갈 사람으로서 좋은 생각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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