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신해철법’ 시행에 긴장… “환자보기 두렵다”
의료계, ‘신해철법’ 시행에 긴장… “환자보기 두렵다”
  • 배지영 기자
  • 승인 2017.01.06 13:55
  • 호수 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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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 시행 이후 의료현장
▲ 지난해 11월부터 상대방의 동의가 없어도 조정절차를 개시할 수 있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시행됐지만 일선 병원 현장에서는 “소극진료가 만연하고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은 의료 분쟁 관련 사건을 상담하고 있는 시민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응급환자 기피 등 방어진료 기류… “과실 없어도 분쟁 늘어날 수 있는 악법”
“불가항력 사고도 책임전가” 호소… 환자단체는 “의무기록 확인절차 강화해야”

사망 등 중대한 의료사고가 발생할 경우 피신청인의 동의 없이도 의료분쟁조정이 가능한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일선 대형병원에서는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혹여 자신의 병원에서 의료분쟁조정법이 적용되는 첫 사례가 나올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30일부터 일명 ‘신해철법’이라고도 불리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시행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사망, 1개월 이상의 의식불명, 자폐성·정신장애를 제외한 장애등급 1급에 해당하는 중대한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상대방의 동의가 없어도 조정절차를 개시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중복장애로 인해 장애 1급이 되거나 이미 장애 1급인 상태에서 의료사고로 동일 부위에 장애가 추가 발생한 경우는 제외된다.
의료분쟁조정제도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소송절차 밖에서 사실조사와 감정을 통해 의료사고 발생 과정에 의료 과오가 있었는지, 환자의 좋지 않은 결과가 의료 과오로 인해 생긴 것인지를 밝히는 제도다. 그러나 중재원이 설립된 지 4년 동안 중재원에 접수된 의료분쟁 상담 3만9000여 건 중 실제 분쟁 조정이 이뤄진 것은 약 1700건(4%) 수준에 불과했다. 그동안은 의료기관의 동의가 있어야만 분쟁 조정절차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의료계, ‘신해철법’ 시행에 우려
이를 위해 정부는 위와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내놓았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의료기관의 과실이 없어도 의료분쟁이 늘어날 수 있는 악법”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우용 대한의사협회 의료분쟁조정법령 대응TF팀 전 위원장은 “나 또한 대학병원 부임 초기에 합병증을 관리하지 못해 말기 환자를 떠나보낸 적이 있는데 당시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법적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경험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환자의 사망에 대한 과실이 없거나 소송에 휘말리지 않은 경우도 의사들은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병원의 동의 없이도 조정절차가 자동 개시되면 앞으로 의사들은 소극적 진료를 할 수밖에 없어 결국 피해는 환자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은 “특히 우리나라는 의료사고와 관련해서 무죄추정원칙이 해당되지 않아 의사들은 자연스럽게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불가항력적인 부분에까지 가해자로 규정하는 것은 의사들이 응급환자를 기피하는 풍조를 만들게 되는 바탕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아마 조정 대상이 아니어도 무조건 신청부터 하거나, 과실 여부를 떠나 환자나 가족이 의사와 병원을 협박해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사례도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사들 “소극진료 만연할 것”
응급실과 병동 환자들을 담당하는 전공의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동훈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은 “현재 병원에서는 개정안 시행 이후 자동 조정절차로 인한 첫 사례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는 분위기”라며 “이렇게 법안에 신경쓰다보니 심각한 중환자가 나타날 경우 진료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개정안 시행으로 의사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며 “이같은 악법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중환자를 보는 외과 등 일부 진료과의 지원율은 더욱더 낮아지고 병원 간 환자 전원도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환자보기가 두렵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 법이 시행된 지 1개월이 지난 현재 사망 위험이 높은 고령 환자들의 진료를 기피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등 기존에 우려하던 방어진료 기류가 흐르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의료계 전언이다.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들을 잘못 진료한 의사들이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스템 문제와 환자의 심각한 질환으로 야기된 불가항력적 상황에서조차 의사들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현실이 무겁기 때문이다.
서울 소재 A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는 질환과 손상을 가리지 않고 진료 결과 응급수술을 하게 될 수도, 중환자실로 입원하게 될 수도 있기에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의 가능성은 항상 내재돼 있다”며 “진료과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 의료사고는 특정 질환, 특정 손상의 경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용한 자원의 부족에 의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즉, 의료진에 의한 의료사고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발생한 의료사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대구 여아 장중첩증(장의 일부가 장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질환) 사건이나 최근 전북의 소아외상 환자 사망사건 등도 환자의 질환, 손상 자체가 중하다기 보다는 자원의 부재에 의한 의료사고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환자단체 “의무기록 확인 절차 강화해야”
반면, 환자단체에서는 ‘소극진료가 남발될 것’이라는 이같은 의료계의 주장을 반박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지금도 변호사 선임 비용만 있으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의사들이 중환자를 기피해온 바는 없다”며 “분쟁조정이 자동개시 된다고 해서 마치 중환자를 기피할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료분쟁조정법에 의무기록에 대한 확인 절차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안 대표는 “의무기록지는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인의 과실 및 인과관계를 입증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면서 “의무기록을 병원이 사후에 수정한 경우, 관련 접속기록 자료와 수정내용을 별도로 작성·보관하도록 의무화하는 입법적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지영 기자 jybae@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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