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의들 ‘생존을 위해’ 전문 과목 간판 뗀다
개원의들 ‘생존을 위해’ 전문 과목 간판 뗀다
  • 배지영 기자
  • 승인 2017.01.20 13:56
  • 호수 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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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 미표시 의원 전국에 5500곳
▲ 비뇨기과‧외과 등 비인기과 전문의들이 생존을 위해 간판에 전문 과목을 표시하지 않고 성형‧미용 등의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진은 한 비뇨기과의원이 성형클리닉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모습.

가정의학과‧외과‧산부인과 등 비인기과 전문의들이 주로 표시 안해
돈 되는 미용성형‧비만 등 비급여 분야 진출 … 애꿎은 환자 피해

외과 전문의 면허를 갖고 있는 A원장은 지난해 9월 이른바 ‘무간판’으로 돌아섰다. 8년 동안 고수해왔던 ‘○○외과 의원’이라는 간판을 버리고 ‘○○의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A원장은 “전문과목을 간판에서 지운 뒤 환자는 이전보다 조금 늘었지만, 전공의 시절부터 가슴 속에 품어왔던 ‘서전’(Surgeon, 외과 전문의)로서의 자존심을 버린 것만 같아 때때로 자괴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이처럼 외과, 산부인과 등 일부 진료과목들을 중심으로 영역파괴, 탈 전문과 바람이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의 면허를 딴 뒤 이를 숨기고 개원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개원기피 과목을 중심으로 A원장처럼 전문과 간판을 아예 떼거나 간판에 과목을 추가해 비급여 진료에 나서는 경우가 흔하게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전문과 미표시 의원의 숫자는 5500여 곳을 넘어섰다. 전체 의원급 의료기관의 숫자가 2만9000여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네의원 5곳 중 하나 꼴로 간판에서 전문 과목 명칭을 지웠다는 얘기다.
전문과 미표시 의원의 숫자는 가정의학과 1800여 곳, 외과가 1000여 곳, 산부인과가 600여 곳, 비뇨기과가 400여 곳으로 가장 많다. 이들은 대표적인 ‘비인기 진료과’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전통적인 인기 진료과에서도 ‘탈 전문’ 바람이 가속화되고 있다. 실제로 내과와 소아청소년과에서 전문과 미표시로 전환한 곳이 각각 150곳을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미용성형 등 비급여 진료과목으로 전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의 전문 과목을 버려야만 했을까? 해당 전문과 진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줄어들다보니, 자신의 전공과목을 표방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를 감춘 채 다양한 환자를 받는 것이 경영상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때마침 불어온 뷰티산업의 발전과 맞물려 간판을 떼고 피부미용으로 전업하는 것이 개원시장의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도 한몫했다.
정영진 대한외과의사회 총무부회장은 “시장 환경이 달라지다보니 의원에서 할 수 있는 수술 수요가 확 줄어들었다. 요즘 외과로 개원해서는 먹고 살길이 없다”며 “과거에는 천공환자 등 의원에서 수술을 하는 사례들이 있었고 한때는 대장항문 수술이 대안이 된 적도 있었지만 병원이 대형화·전문화되면서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타산이 맞지 않으니 자연히 외과 간판을 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허탈해했다.
김승진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의사회 회장도 “흉부외과의 경우 고가의 장비가 필요해 단독 개원이 힘들뿐더러 막상 개원을 해도 간판을 버리고 일반과로 돌아서는 것이 태반”이라면서 “현재 흉부외과 개원의들은 생계를 위해서 30%는 미용성형을, 나머지 60%는 일반의로 살고 있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이처럼 생존을 위해 비급여 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환자들의 혼란을 막자는 취지로 간판을 아예 떼게 된 것”이라며 “병원의 정상적인 경영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기존 전문과 진료를 유지한 채, 타 진료과의 비급여 진료를 추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비뇨기과 간판을 유지하면서 피부미용 진료를 추가하거나, ‘○○ 여성의원’이라는 간판 아래 산부인과‧체형관리‧피부관리 클리닉 등 세부진료내용을 함께 나열하는 식이다. 건강보험 진료수가가 낮다 보니 일반적인 급여진료만으로는 의원 경영이 어려워 차선책으로 비급여로의 전환이나 급여와 비급여 진료의 병행을 선택한 것이다.
노만희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은 “전문과 간판을 떼고 아예 전업을 할 경우, 기존 단골환자를 포기해야 하는 데다 일이 뜻대로 안 풀릴 경우 다시 기존의 전문과 진료로 돌아오기가 어려워진다”며 “표시과목 혼합표기는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을 반영한 선택으로, 개원시장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어도 시장기능을 정상화하는 실질적인 대안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특히 특정 분야에 타 진료과목 전문의가 늘어나게 되면 숙련되지 않은 기술로 인해 의료사고를 초래할 수 있어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에게 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대한성형외과학회에 소속된 성형외과 전문의는 2200여명 정도이지만 실제 성형시술을 하는 의사는 이보다 10배 정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이 급여진료만으로 병원 경영이 힘든 의사들이 전문과목과 무관하게 성형·피부·미용 쪽으로 진출하면서 성형외과를 찾는 환자들이 전문의와 비전문의를 구별하기 힘들어졌다.
한 성형외과 전문의는 “쌍꺼풀 수술만 해도 간단한 수술이 아니다. 전문의들도 처음에는 벌벌 떨면서 수술을 시작했다”며 “최근 많은 비전문의들이 성형‧시술 등을 하면서 피부 괴사, 시각 손상, 반신불수가 되는 사례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환자들의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피부관리를 하는 의원은 도처에 있지만 정작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의원은 찾기 힘들다”며 “국민들이 간단한 피부질환 치료를 위해 진료가 가능한 의원을 찾아 다녀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궁극적으로 개원의의 존재 이유에 대해 국민들도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부가 일차 의료기관의 경영난 해소와 균형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정영진 외과의사회 총무부회장은 “전문과목 미표시로의 이탈은 정부의 전문과 균형발전 정책에 실패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면서 “외과 수가를 인상했다지만 실제 개원가에서는 인상효과를 전혀 체감할 수 없다. 일차 의료를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인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지영 기자 jybae@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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