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준 헌법재판소 재판관
송인준 헌법재판소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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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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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있는 재판관 판결 때마다 남모를 진통이…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허용하던 ‘안마사에 관한 규칙’ 제3조가 국민의 직업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위헌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로 시각장애인들이 반발하며 마포대교에서 농성을 하고 있고, 여러 명이 뛰어내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이에 본지는 이번 위헌심판의 주심을 맡았던 송인준 재판관을 만나 위헌 판결의 배경과 법률가이기 전에 장애우에 대해 나름대로 관심을 쏟아온 한 개인으로서의 안타까운 심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법을 교통신호등과 같은 인류 문명의 도구라는 생각을 하며 헌법재판소 송인준 재판관 집무실을 찾았다. 교통신호등은 단지 빨강, 노랑, 파랑색 등 색깔로만 표시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길에 다니기 때문에 교차로 사거리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사람 목소리로 교통신호를 알려주기도 한다.


교통신호등이 그런 것처럼 시각장애인의 생계를 위해 보건복지부 규칙으로 배려된 부분을 굳이 위헌이라 할 이유가 있을까? 흔히 말하는 대로 법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일까. 이제껏 그것을 감수해왔지 않은가. 그런 질문을 준비하고 송 재판관과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시각장애인들의 마포대교 농성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소식을 접하는 송 재판관의 최근 심기가 어떤지 물었다. 송 재판관도 그 부분에서는 마음고생을 한 듯 표정이 어두웠다.


“개인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이 자살하는 것은 가슴 아픕니다. 개인적으로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아니지만 검사장 할 때 장애인 협회 일을 돕기도 했고 그랬습니다.”


가슴 아픈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언제든지 이번 판결과 같은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번에 위헌 판결을 한 조항은 안마사에 관한 규칙’ 제3조 1항 제1호와 제2호 중 각 “앞을 보지 못하는” 부분. 송 재판관에 따르면 이 조항은 90년 전,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칙령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실질적으로 생존권을 보장하는 기틀이 전혀 아닙니다. 직업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고 원천봉쇄를 하기 때문에 비장애 국민에게 더 많은 불편과 기본권을 제약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송 재판관은 이번 위헌판결이 관련 분야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번 위헌판결은 어느 정도 예고된 면이 있었다. 2003년 이 문제와 관련하여 법률 형식에 관한 위헌 여부를 심사했었다. 내용적인 것이 아니라, 법률의 형식에 관한 것이었는데도 5대 4로 가까스로 합헌 결정이 났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문을 보면 송 재판관의 위헌 의견은 거의 합헌 수준으로 느슨하다.


송 재판관은 판결문에서 “시행 역사에 비추어 안마사는 원칙적으로 시각장애인에게 허용되는 업종이라는 일반인의 법의식이 형성되어 왔고, 이러한 정부 정책에 대한 시각장애인들의 신뢰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이 비맹제외기준을 설정한 것은 의료법 제61조 제4항에 내포된 의미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렇다면 이 사건 규칙조항 또한 명백히 모법에서 정하고 있는 위임의 기준과 범위 내에서 기본권 제한 사유를 정한 것이니만큼 법률유보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송 재판관은 “기본권 제한의 정도 면에서 보면 과잉규제에 해당되어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결 이유를 밝히고 있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헌법 15조에 규정돼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직업 선택을 해서 수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국가는 그것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때 원천적으로 직업을 선택할 수 없게 하는 예외적인 경우, 이론상으로 월등하게 중요한 공익을 위해서. 명백하고도 확실한 위험을 방지할 경우에만 제한하도록 돼 있습니다. ”


송 재판관은 그러면서 시각장애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고용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국의 보건소를 비롯하여 노인복지시설 들을 합하면 5000여 곳이 있는데, 1명씩을 고용해도 5000여 명이 생계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연합 뉴스에도 나왔습디다. 헬스 키퍼(Hells Keeper)라고 산업체에 시각장애인 안마사를 파견하여 직업병 예방하고 업무효율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팔이 짧은 사람에게 긴 칼을 주고, 팔이 긴 사람에게 짧은 칼을 주는 그런 사회, 그런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이번 판결이 나왔음에도 원성을 사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는 뜻이다.
헌법 불합치 판결을 했으면 어떨까. 시각장애인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면 좋았지 않았느냐는 얘기에 송 재판관은 사안의 성격이 그럴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법률의 경우에만 불합치가 있습니다. 당장 국가운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것은 규칙입니다. 규칙은 당장 폐기돼도 생활이 됩니다. 불합치 판정을 안 합니다.”


본 뜻을 오해하고 항의전화도 오고 하지만, 시위 농성도 열심히 하고 항의도 해서 좋은 제도를 만들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단, 극단적인 수단은 절대로 선택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부탁하기도 했다. 미국의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은 우리도 본받을만하다고도 했다.

 

미국 시스템의 골간은 ‘우선적 처우이론’이다. 헌법 근거가 없어도 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대하는 시책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우표, 복권, 공공시설 내에서의 매점이나 가판점을 운영할 수 있게 하고, 25인 이상 사업장에서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돼 있다.

 

물론 안마사 자격과 같이 특정한 분야의 종사자를 위해 자격을 특정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
“저한테 전화로 심하게 말하고, 경찰이 신변보호를 할 정도가 됐습니다만 제 본뜻은 정말 그것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에게 피해를 주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시각장애인과 다른 장애인 그리고 비장애인을 위한 충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충성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인가 보다. 판관으로서의 소신과 용기는 결국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하다는 신념이 없이는 못하는 것인가 싶어지기도 한다.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판결에서도 송 재판관은 위헌 입장에 섰었다. 대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송 재판관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이다. “역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화형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가 옮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나 이번 사건이나 판결 자체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가슴 아프고, 이래저래 힘들지만 시각장애인의 인간다운 권익을 인정해주는 제도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송 재판관의 바람이다.


이런 업무의 중압감을 어떻게 풀까? 송 재판관은 등산 예찬론자였다. 젊은 검사시절에는 테니스를 즐기고 그 뒤로 쭉 골프를 쳤는데, 지금은 등산이 최고라고 한다. “골프는 심심한데, 등산은 정말 맛이 있어요.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힘든 고통을 이겨내며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희열이 골프에는 없어요.”


피도 눈물도 없는 법률가일 것 같은 송 재판관은 의외로 가슴이 따뜻한 남자다. 시집을 2권이나 낸 시인이자 기고 글을 책으로 낸 문필가이기도 하다. “늘 가슴을 따뜻하게 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고교시절에는 문예반으로 활동하고, 대학에서는 막걸리 값이라도 벌어볼 생각으로 학교신문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었지요.”


그래서 시를 쓰고 글을 사랑하는가 보다. 법을 하는 사람들이 보통 머리는 차가운데, 문학적 소양이 있으니 지성적인 감성의 소유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번 위헌 판결에서도 가장 약한 위헌 의견을 낸 것도 그런 따뜻한 가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송 재판관 본인은 따뜻함도 절제를 한다고 덧붙인다. 행정수도나 이번 안마사자격에 관한 규칙에 대한 심판은 사실 감성이 작용할 여지가 많은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절제했고, 결과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 됐지만 법률은 법률이라는 것.


32살에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얘기를 듣고 효자였는지 물어보았다. “예, 효잡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1997년에 세상을 떴으나 지금까지도 효심이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32살 청상에 홀로 되셨는데, 저는 어머니의 종교였어요. 어머니가 원하는 것 다 해드렸어요. 서울대 가고, 법조인도 되고… 저에게도 어머니는 종교였습니다.”


어떻게 어머니를 모셔야 효도하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원하시는 것 다 해드리는 것이지요. 숙녀복이면 숙녀복, 양복이면 양복 화려하게 입히는 것이 좋습니다. 좋아들 하세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나는 별 욕심 없습니다. 관료로 오래 살았습니다. 벌거벗음의 힘이랄까, 아름다움이랄까. 앙상한 겨울나무, 그 본질만 남은 모습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적나라한 나무가 갖는 아름다움 그런 것을 추구할 것입니다.”


1944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63세. 관료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자신감이 아닐까 싶다. 차기 헌재소장 물망에 오르는 이유가 이런 데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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