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내면의 상실감, 절제된 감성으로 섬세히 표현”
“인간 내면의 상실감, 절제된 감성으로 섬세히 표현”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10.13 13:58
  • 호수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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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한 日 출신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 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와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대표작들.

[백세시대]

원폭 떨어진 나가사키 출신, 5세 때 영국 이주… 데뷔작부터 극찬 받아
3번째 장편 ‘남아있는 나날’로 맨부커상 수상… 주요 작품 영화로 제작

“그는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우리의 환상 밑의 심연을 드러냈다.”
지난 10월 5일, 스웨덴 한림원은 매년 10월 첫 번째 목요일 노벨문학상을 발표한다는 관례에 따라 올해의 메달 수상자를 공개하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와 같은 찬사를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가는 일본 태생의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였다. ’연금술사’ ‘오 자히르’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와 ‘노르웨이의 숲’ ‘1Q84’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 등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선정돼 지난 해 미국가수 밥 딜런에 상을 준데 이어 세계 문학계에 또 다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5세 때 아버지가 영국국립해양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영국 켄트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29살이 되던 1982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데뷔작인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영국작가 위니프레드 홀트비(1898~1935)를 기념하는 문학상을 수상했고 세 번째 장편 ‘남아있는 나날’로 국제적 권위의 맨부커상을 받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의 이목을 받았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 이후 국내에서 비교적 덜 주목받았던 그의 책도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수상 전 일주일간 그의 책은 단 6권이 판매됐지만 수상 닷새 후에 집계한 판매량은 3138권으로 전주와 비교해 530배 늘었다.
이시구로는 유년시절부터 이방인으로 지내면서 형성된 정서인 상실감을 작품에 녹여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상실감과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을 유려하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2년 발표한 ‘창백한 언덕 풍경’은 나가사키 원폭과 딸의 자살을 겪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삶의 고통과 상실을 그린 작품이다. 영국에 살고 있는 중년 여인 ‘에츠코’는 일본인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로 상심에 빠진다. 영국인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니키’가 집에 와 있는 동안 에츠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둘 회상하면서 과거의 고통과 마주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전쟁과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의 황량한 풍경을 투명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그리며 전쟁의 상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에게 맨부커상을 안긴 ‘남아있는 나날’(1989)은 자신이 모신 주인이 나치 지지자였음을 알고, 집사로 헌신하기 위해 버린 가족·사랑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노년의 상실감을 묘사했다. 작품은 집사로서 평생을 보낸 남자 ‘스티븐스’의 6일간의 여행을 따라간다. 근대와 현대가 뒤섞이면서 가치관의 대혼란이 나타난 1930년대 영국의 격동기를 지난 ‘스티븐스’의 과거를 들여다본다. 이 과정을 통해 인생의 황혼 녘에 깨달아버린 잃어버린 사랑의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해 내밀하게 표현했다. 1993년 제임스 아이버리 감독이 연출하고, 안소니 홉킨스, 에마 톰슨이 주연한 동명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95년 낸 장편역사소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도 인상적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성공을 위해 버려야 했던 가치들을 되살리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과정이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몽환적인 배경에서 펼쳐진다. 젊은 날 놓쳐 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좌절감에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지난날에 대한 회한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초현실적인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현대인의 쓸쓸한 자화상과 심리를 그려낸 수작이다.

1900년대 중국 상해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2000)는 이시구로의 실제 경험이 담긴 가장 사적인 작품으로 되돌릴 수 없는 유년 시절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상해 주재 영국 기업인으로 아편을 파는 아버지와 상하이 최고 미인으로 알려진 어머니가 어느 날 행방불명된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부모님을 찾기 위해 상해로 돌아오고 어릴 적 아름답게만 보였던 장소들이 얼마나 추악한 곳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기존 소설과 달리 긴장감으로 손을 쥐게 만드는 추리소설이다.

또 다른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는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물질 이기주의를 비판한 소설이다. 2005년 발간 이후 ‘타임’지(誌)의 ‘100대 영문 소설’ 및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됐고, 전미 비평가협회상과 독일 코리네 상을 수상했다. 간병사 ‘캐시’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복제돼 온 클론들의 사랑과 성, 슬픈 운명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복제 인간의 삶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단편을 묶은 소설집으로는 ‘녹턴’ (2009)이 있다. 표제작인 ‘녹턴’은 한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는 이시구로의 정체성을 녹인 단편이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젊은 날의 희망이 차츰 멀어질 때 음악과 인생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애잔한 삶을 그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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