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의 선비론-한림(翰林) 선비 사관(史官)
이동희의 선비론-한림(翰林) 선비 사관(史官)
  • super
  • 승인 2006.08.2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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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창경궁(昌慶宮)부터 홍익인간의 주체성 있는 홍화문(弘化門)과 밝은 정치의 명정전(明政殿), 경연(經筵)을 공부하는 숭문당(崇文堂) 그리고 문으로 정치하자는 문정전(文政殿)까지 일사불란하게 선조들의 문민(文民)정치 발자취를 느껴봤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 듯이 선비 사대부들의 삶에는 한결같이 법도가 있다.


문정전에서는 국왕을 모시고 삼정승, 육조판서 그리고 훈구대신들이 오늘날의 국무회의를 열었다. 그곳엔 반드시 춘추관(春秋館)에서 파견된 젊은 한림 선비 두 명이 마주 앉아 있다. 이른바 사관(史官)들이다. 조선조에서는 절대로 왕과의 독대는 하지 못하고 사관이 배석해야 한다.


사관은 그 회의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형용사 없이 그대로 직필(直筆)해 사통(史桶)속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왜 사관이 둘씩이나 될까? 그것은 바로 왼쪽 사관은 말씀을 적고 또 오른쪽 사관은 그 말 하는 사람의 표정과 태도를 적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비디오테이프’를 붓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사관의 기록은 당시 국왕에 대한 미래의 평가표가 돼 왕권에 대한 견제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이 즉위한지 4년 만에 태종(이방원)이 서거하자 세종은 은근히 태종에 대한 사초(史草)가 궁금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사관에게 “태종에 대한 사초(史草)를 볼 수 없냐”고 청했다. 그러자 사관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물론 가필(加筆)은 안하시겠지만, 그래도 주상 같은 성군이 이것을 보시면 다른 왕들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실록은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세종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세종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다.


그 사초는 왕의 손자 대에 가서야 공개돼 조선왕조실록 888권을 편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록을 여섯 개의 제본으로 만들어 오대신, 성주 전주 등에서 보관하고, 여름에는 하관(夏官)이 습기를 제거해 500여년을 생생하게 보존했다. 이것은 선비들이 만든 세계적인 법제사가 되고 기록정치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이와 같이 중대한 직책을 수행하는 사관 선발의 책임을 지는 이들은 단(壇)을 모아 향(香)을 피우고 “만일 내가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천거한다면 재앙을 받아도 좋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했다고 한다. 사관은 비록 오늘날의 사무관 급이지만 그 인사추천에 책임을 지는 모습이 선비다웠다.


오늘날 우리 정부의 기록문화는 어떠한가. 기록 없이 투명한 정치는 없다. 왜냐하면 정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조 500년의 생명력은 바로 기록정치의 견제로 법치사회를 확립한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가 만든 사대사서(四大史書)는 무서운 전통이다.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곧 우리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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