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박정희 前대통령 ③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박정희 前대통령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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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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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이끌어 갈 열 가지 지도자의 덕목 갖춰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세번째로 박정희 전대통령 편을 연속 게재합니다.  〈기획 취재팀〉


‘5·16 혁명’ 뒤, 박정희 대통령이 제시했던 지도자도(指導者道)에 대해서 일본 언론인 겸 교수출신 저술가 하야시 다케히코(林建彦)는 저서 ‘박정희 시대’에서 지도자에 굳이 도(道)라고 한 것이 검도, 유도, 다도, 화도 등 무엇이건 도(道)라고 하는 일본적인 처세관의 농도 짙은 투영이라고 해석했다.

 

하야시 다케히코가 그런 해석을 한 데는 주미대사를 지낸 김경원의 증언 등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자관을 그렇게 본 데에 따로 짚이는 데가 있다.


전회(前回)에서 보았듯이 일본인을 굳이 ‘왜놈’이라고 비하할 정도로 반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청년 박정희였다.

 

그러니 일본의 근대성이나 세계와 전쟁을 벌일 정도의 국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참고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에 대한 개념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5·16혁명’의 과업 수행을 위해 확립해야 할 지도자의 도로 삼은 열 가지를 두고 하야시 다케히코는 혁명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평가했다.

 

동지의식, 판단과 해결능력, 선견지명, 원칙에 충실한 양심적 인물, 용단,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목표를 달성하는 확신, 지도자의 단결, 성의 정열, 신뢰감 등 열 가지 모두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5·16혁명’ 이전의 박정희 대통령을 이런 지도자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기록으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간관계나 인생관, 인생 여정으로 보아 위의 열 가지 지도자의 면모가 엿보인다.

 

공산당 조직에 이름이 오른 것도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 혐의로 체포되어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구명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자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순사건으로 숙군 대상, 백의종군


김정렬 육군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전신)장과 백선업 정보국장 등이 구명에 힘을 썼는데, 백선엽 정보국장은 ‘저를 좀 도와주시오’라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도와 드리지요’라고 말하고 말았다고 한다.

 

생사의 위기에서도 인간적으로 신뢰감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형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보아 감형을 거듭한 끝에 민간인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본 정보국에서 백의종군하는 것은 살아남은 것 못지않게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늦깎이로 군인이 되었고, 해방 당시 중국에서 1년여를 머물다가 귀국하는 바람에 국군창설에 참여하지 못해 나이 어리고 기수가 낮은 사람들이 계급이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힘든 일인데 군에서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경력문제로 백의종군하게 되어 스트레스가 엄청났을 것이다.


지인들이나 측근들에 따르면 이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은 거의 술과 함께 연상된다는 증언들이 많다. 배갈, 막걸리, 소주 등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고 한다.

 

당시 정보국 5과장 차호성 소령은 깨어 있을 때는 목석과도 같은 사람이었으나 술을 마신 뒤에는 감정 표현이 자유분방해지고 한량 같은 기질을 유감없이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5·16 거사의 주역이 되는 육사 8기생들과도 이때 술과 더불어 끈끈하게 맺어진다. 조갑제 기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백선엽 국장의 지시로 육사 8기생 중 우수한 졸업생 30여 명을 정보국에 뽑아왔는데, 이들 중 김종필, 이영근, 이병희, 전재덕, 석정선, 서정순 등 15명이 박정희 대통령이 있던 전투정보과로 배속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을 무교동의 ‘은월정’이라는 술집으로 자주 데리고 나갔다. 김종필 전 총리는 “나는 당을 많이 만든 사람인데 그때는 대한 음주당을 만들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술 좋아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당수로 삼아 거의 매일 막거리를 마시러 다녔다는 것이다. 음주당 당원의 등급은 주량과 태도에 따라 ‘주신(酒神), 주성(酒聖), 주호(酒豪), 주걸(酒傑), 주객(主客)으로 나누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는 “당수 자격이 없어 주호만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상하관계 의식 안해


이영근은 ‘우리에게 그분은 형님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업무에 대해서는 엄격한 분이 술자리에서는 상하관계를 의식하지 않도록 소탈하게 우리를 대해주었어요’라고 회고했다.

 

깐깐하고 과묵한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출발점이 부하들에 대한 이런 인간적인 친화력이었던 것 같다. 술을 통한 허심탄회한 대화들은 특히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죽음의 위험과 기밀을 공유하는 것 못지않게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작용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에 있어서 술은 시작점이거나 매개체였을 뿐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결국 군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이었다.

 

이영근은 당시 육사 8기생들의 눈에 박정희 대통령은 ‘하나의 경이’였다고 회고한다. 청년 장교들이 작성하여 올린 서류를 검토하고 때로는 교열도 했는데, 보고서 작성 실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전투상황 판단과 예측 분야에서도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보고서 작성을 잘한다는 것이 알려져 여러 장교들이 보고서 작성을 부탁하기도 했고, 작성한 것을 가져와서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민간인 신분의 과장 직함으로 있던 때 전투정보과 남한 담당이던 한무협 소령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든 전투교범 ‘상황판단’을 완전히 이해한 듯했다면서, “매사에 판단이 치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이 지도자도에 대한 하야시 다케히코의 ‘일본적인 투영’이라는 분석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고 자기 과시형의 군인도 아니었다. 장교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주장을 하면 대놓고 지적하거나 질책하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도로 의사표시를 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보고서의 오류를 바로잡거나 수정해 당사자 책상에 살짝 가져다 놓아 창피하지 않게 배려하는 매너도 있었다. 육사 8기생을 비롯한 휘하 장교들에게 한 가장 심한 욕이 ‘그 자아식!’이라고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남침 예상한 상황판단능력


하지만 그럼에도 6·25동란이 일어날 때까지 그는 복직하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마음은 파김치가 돼 있었을 터였다.

 

전투정보과에서 북한의 남침을 예상했을 정도로 상황판단능력 등 여러 면에서 우수했으나 한때의 경력은 세탁이 어려웠다. 그러다 6·25동란 발발 3일 뒤 박정희 대통령은 수원에서 복직을 했다. 호리병 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던 요정이 그런 심정이었을까. 기뻐하거나 들뜬 모습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복직을 하고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전쟁기간 동안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때 멈칫거린 시간은 돌이키기 어려웠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도리 없이 동기생들이나 비슷한 기수 선·후배들의 경쟁 대오를 쫓아가는 형편이었다.

 

비슷한 기수보다 나이가 많고 군인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으나 숙군 때 체포되었던 경력은 씻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조건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을 혁명가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복직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술로 울적함을 달래던 비운의 사나이가 아니었다. 혼인시장에 내놓아도 여성들이 좋아하게 생긴 매력적인 남성상을 되찾았다.

 

전란 중인 1950년 8월, 부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선을 본 육영수 여사는 처음 본 박 대통령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조갑제 기자의 글에 따르면 동생 예수씨에게 “글쎄, 눈이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데 굉장히 무서웠어.

 

콧날이 날카로워 성깔이 있어 뵈더구나. 그러나 주관이 확고하게 서 있는 듯한 그 눈에 마음이 끌려”라고 육 여사가 말했다고 한다. 또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서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에요”라고 했다고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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